[지방선거 D-4] ‘여당의 고향’ 대구 민심 르포
30일 대구의 동대구역, 시청 앞에서 만난 시민들은 대구시장 선거 전망을 묻자 “내가 뭘 아나. 관심 없심더”라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한두 마디 얘기하다가도 이름을 알려달라면 “됐다 마”라고 손사래를 쳤다.
대구 사람들은 낯선 이에게 쉽게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상대가 같은 편이거나, 적어도 정서적 동질감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들은 과장된 퉁명스러움으로 마음을 감춘다. 이날 대구 중구의 한 식당에서 술잔이 몇 차례 돈 뒤에야 전기설비업을 하는 이창호 씨(44)가 말문을 열었다.
○ “김부겸 사람은 좋은데 당이 좀…”
선거 때마다 보수정당에 몰표를 줬지만 돌아온 것은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저성장뿐이었다는 것. 대구의 1인당 지역총생산(GRDP)은 전국 시도 가운데 19년째 최하위다. 10여 년 전부터 인구는 매년 1만 명씩 줄고 있다.
전날인 29일 최대 번화가인 동성로는 오후 10시 반이 채 되지 않았는데 가게의 80%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이곳에서 만난 김봉규 씨(35·회사원)는 “지금 대구는 폐허와 같다”고 했다.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한 김 씨의 동기들은 서너 명을 빼곤 경기나 대전, 부산, 경남 창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그는 “이곳에선 일하고 싶어도 취직할 기업이 없다”며 쓴 입맛을 다셨다. 변화의 욕구만큼이나 체념도 컸다.
하지만 대구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다. 50대 이상의 여당 지지세는 견고했다. 개인택시를 모는 정화정 씨(73)는 “그래도 1번 안 찍겠나. 대구가 디비지면(뒤집어지면) 나라가 난리난다”고 했다. 야당에 대한 불신도 여전했다. 이주엽 씨(64)는 “김부갬이가 사람은 참 괜찮데이. 근데 당이 파이다(안 좋다) 아이가. 차라리 무소속으로 나오면 좋을 낀데”라고 했다.
매일신문과 TBC대구방송이 25, 26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 권영진 후보는 43.5%의 지지율을 얻어 김 후보(30.8%)에게 12.7%포인트 앞섰다.
대구에서 두 후보는 색다른 선거전을 벌이고 있다. 권 후보는 ‘대구 혁신, 새로운 희망’을, 김 후보는 ‘박근혜 대통령-김부겸 대구시장, 대구 대박’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여당 후보가 ‘혁신과 변화’를 강조하고 야당 후보가 오히려 ‘박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우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권 후보 측은 친박(친박근혜)계인 서상기, 조원진 후보를 누르고 승리한 것이 시민들의 변화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자부하고 있다. 20년간 관료 출신 시장이 이끌어 오던 대구 시정에 정치력과 행정 경험을 함께 갖춘 권 후보가 새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것.
김 후보는 19대 총선에서 40.4%의 득표율로 돌풍을 일으킨 경험을 토대로 ‘야당 시장 대박론’을 꺼내 들었다. 그는 조만간 이전하는 경북도청 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리는 컨벤션센터를 짓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화제가 됐다.
30일 새벽까지 이어진 TV토론에서 15년간 ‘형님 동생’으로 지내던 두 사람은 때론 얼굴을 붉힐 정도로 날선 논쟁을 이어갔다. 김 후보는 쇠락해 가는 대구 경제의 책임을 정부 여당에 돌리며 “이번 기회에 야당을 활용하라”고 강조했다. 권 후보는 “민주당 시절 박 대통령을 비난한 김 후보가 박근혜 마케팅에 나서는 것은 거짓된 행동”이라고 몰아붙였다.
변화를 바라는 20∼40대가 적극적인 투표에 나설지가 이번 선거의 판세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동남권 신공항 이슈도 막판 쟁점으로 가세했다. 새누리당이 부산시장 선거를 의식해 ‘가덕도 신공항’에 무게를 싣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대구에선 날카로운 반응이 터져 나왔다. 황석주 씨(55)는 “지금까지 보수 정당만 줄곧 찍어 준 보답이 신공항 뺏어가는 것이냐”며 울분을 토했다.
대구 사람들이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진짜 이유는 여당의 ‘정치적 경제적 텃밭’이 ‘폐허’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상처 난 자존심을 보여주기 싫다는 뜻이었다.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이들의 깊은 상실감과 무기력증을 달래야 하는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됐다.
대구=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