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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형의 기웃기웃]망각이란 신이 주신 선물

입력 | 2014-05-31 03:00:00


캠퍼스 커플이 헤어지고 나면, 참 곤란하다. 헤어진 다음에도 매일 얼굴을 봐야 하니까. 게다가 그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모든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소문에 굶주린 그 시선. 그런데 한 선배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잘 지냈다. 선배의 사랑이 시시했던 것도 아니고, 만남이 짧았던 것도 아니고, 그 끝 또한 좋은 기억일 순 없었는데도, 헤어진 그와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 선배가, 나는 너무 의아했다. 그런데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냥 죽었다고 생각해.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그 사람은 죽었다고.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고.” 그게 돼요? “처음엔 잘 안 되지. 근데 시간이 지나면 돼. 원래 사람은 너무 힘들면 도망가게 돼 있거든. 자기 보호 본능이지.” 힘든 기억으로부터 도망을 친다. 잊은 척, 모른 척, 애를 쓴다. 그러다 정말 잊게 된다. 그래서 무슨 일을 겪고도 사람은 또,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한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그 후 때때로, 선배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아픈 일, 슬픈 일,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선배의 말이 묘한 위로가 되어 주기도 했다. 이 또한 곧 지나갈 것 같아서. 이 또한 곧 잊게 될 것 같아서.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너무 아파서, 너무 창피해서, 너무 힘들어서, 자다 가도 벌떡 깨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밤들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진 않았다. 아픔은 옅어지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그래서 또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믿게 되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들 중,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일 수 있겠다고. 힘든 세상에 던져진 인간들을 가엾이 여긴 신이 주신 선물, 그게 바로 망각일 수 있겠다고.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그 선물을 넙죽넙죽 잘 받아 썼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 전 아침, 또 눈물이 터졌다. 나는 사실 눈물이 많은 편도 아니고, 이렇게 펑펑 울어본 지는 참 오래됐는데, 이번 달에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퉁퉁 부은 무거운 눈으로 하루를 보낼 생각에 짜증도 나고, 그럼에도 눈물이 나는 이 상황에 화도 나고, 그렇다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무력함에 또 지치고, 그때 마침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투정을 부리게 됐는데, 친구 역시 요즘 자꾸만 눈물이 터져 힘들다고 하니, 문자 창에 “정말, 힘들어서 못 살겠…”까지 쳤나 보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사람은 너무 힘들면 도망가게 돼 있어. 자기 보호 본능이지.’ 오래전 선배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도망가면 어떡하지, 나만 살겠다고 모른 척, 나만 좀 편해지겠다고 잊으면 어떡하지.

‘너무 힘들면, 도망가게 돼 있어. 그래야 또 살 수 있거든.’ 처음으로 그 말을, 잊고 싶어졌다. 잊어야 또 살 수 있으니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 그 말을 처음으로 거부하고 싶어졌다. 세상엔, 잊으면 안 되는 일도 있는 거다. 잊히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그 선물을 반납하고 싶어졌다, 망각이란 신이 주신 선물. 대신 다른 선물 하나를 바라게 되었다. 아무리 아파도, 이번만은 우리 모두 끝까지 지켜볼 수 있기를. 아무리 힘들어도, 이번만은 우리 모두 끝까지 잊지 않을 수 있기를.

강세형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