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정지원 지음·노인경 그림/215쪽·9500원·문학과지성사
짝짓기 축제도 끝나고 텅 빈 욕실에서 제 처지를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던 아늑이 인간에게 잡힐 뻔한 순간, 어디선가 위험을 경고해 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컷 바퀴벌레 ‘부드’. 부드 역시 인간이 욕실 샤워기를 교체할 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그만 갇혀버린 가련한 처지다.
아늑은 삶에 대해 냉소적인 부드가 마냥 편치만은 않지만 주눅 들어 있던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독설을 가장한 인생의 지혜를 들려주는 그를 다른 그 누구보다 가깝게 여긴다. 아늑이 부드에게 자신의 장기인 노래를 가르쳐 주고 시시콜콜 바깥세상의 얘기를 전하면서 둘은 속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살충제를 앞세운 인간의 습격에 생사의 기로에 놓인 아늑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부드를 샤워기 밖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긴 모험을 떠난다.
차분한 톤의 감성적인 삽화도 책을 읽는 여운을 더한다. 바퀴벌레의 노래가 수시로 등장하는 건 작가가 애초 뮤지컬 제작을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이란다. 1920년대 스페인에선 나비를 사랑한 바퀴벌레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 관객들의 비웃음만 사고 대실패로 끝났다는데, 글쎄, 이 작품은 뮤지컬이 되어도 웃음보다 감동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