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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있을 때는 모르는 존재감

입력 | 2014-05-31 03:00:00

일상 곳곳서 볼수 있는 역대 최고의 공산품 디자인 94가지 족보
◇세계의 디자인/필립 윌킨슨 지음·박수철 옮김/256쪽·3만9000원·시그마북스




위쪽부터 스위스 군용 칼(1897년), 라이카 M3 레인지파인더 카메라(1954년), 앵글포이즈 전등(1936년), 토네트 너도밤나무 의자(1859년). 짧게는 60년, 길게는 155년이 흐르는 동안 큰 변형 없이 꾸준히 사용됐다. 세계 곳곳에서 생산된 수많은 모사품이 이들 원형(原形) 디자인의 가치를 증명한다. 시그마북스 제공

좋은 디자인은 도드라지지만 거치적거리지 않는다. 일부러 더듬어 찾기 전에 일상을 둘러싼 역사적 디자인의 사례를 선뜻 집어낼 수 없는 이유다. 원형을 곁눈질해 찍어낸 모사품이 넘쳐나는 현실도 사용자를 디자인에 무감해지도록 만든다.

이 책은 원조와 복제가 뒤섞인 현대의 디자인 카탈로그에서 어정쩡한 잔가지를 말끔히 솎아낸 족보다.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공산품 디자인의 94가지 원형적 성취를 간결하게 짚어냈다.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단도직입 본론을 들이민 구성이 돋보인다. 사용자의 필요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다듬어낸 디자인처럼 독자의 실질적 관심에 집중했다. 디자인마다 할당한 지면은 2쪽. 폴크스바겐 비틀 1300(1938년), 베스파 스쿠터(1946년),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1954년), 라이카 M3 카메라(1954년) 등 2쪽만으로 아쉬운 15개 제품에는 4쪽을 할애했다.

큼지막한 사진 1장을 중심으로 눈여겨볼 부분의 상세도와 설명, 디자인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 디자이너 약력, 비교해 살필 만한 다른 사례, 개발 당시의 흥미로운 뒷얘기까지 알차게 엮었다. 인체나 손 그림과 나란히 놓아 실물 크기를 짐작하게 돕는 작은 그래픽도 일일이 붙였다. 풍성하지만 어수선함은 없다. 주관적 평가를 최대한 줄이고 기억해두면 요긴할 사실만 영리하게 간추렸다.

첫 장의 주인공은 1859년 독일 가구 제작자 미하엘 토네트가 증기를 쐬어 구부려 만든 너도밤나무 의자. 마지막 메뉴는 4년 전 프랑스 디자이너 필리프 스타르크가 내놓은 폴리프로필렌 의자다. 두 의자는 재료의 질감이 전혀 다르면서도 묘하게 닮았다. 실용성 외에 모든 것을 덜어내면서 자연스럽게 얻은 맵시 때문이다. 언뜻 보면 이것저것 연대순으로 나열한 듯 보이는 책 전체를 깔끔한 북엔드처럼 감싸 묶은 수미상응이다.

소개된 디자이너들 중 상당수, 특히 가구를 만든 이는 대부분 건축가다.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가 192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엑스포 전시를 위해 고안한 크롬도금 강철프레임 가죽쿠션 의자는 “적을수록 좋다(Less is More)”는 그의 설계관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책에 소개된 디자인 사례들의 강력한 존재감은 일상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구 위 모든 스마트폰에는 1931년 노르웨이 화가 예안 헤이베르그가 디자인한 에릭손 DBH1001 전화기의 흔적이 또렷하게 찍혀 있다. 벨이 울릴 때 뜨는 송수화기 마크. 송화기와 수화기를 합성수지 베이클라이트를 써서 처음 결합시킨 83년 전 디자인이 지금도 ‘전화기’를 대변하는 유일한 기호인 것이다. 1936년 영국의 조지 카워딘이 디자인한 앵글포이즈 전등은 할리우드의 유명 캐릭터다. ‘토이 스토리’의 존 래시터 감독이 1986년 앵글포이즈 전등 부자(父子)를 의인화한 2분짜리 애니메이션 ‘룩소 주니어’를 선보인 이후 이 전등은 모든 픽사 애니메이션 첫머리에 마스코트처럼 등장하게 됐다. 복제품이 너무 많아 복제처럼 보이지 않게 된 압도적 원형이다. 영국 런던 지하철 노선도(1931년)와 독일 뮌헨 올림픽 종목별 그림문자(1972년)는 각각 해당 표기의 형태와 색상 표준을 제시했다.

저자가 “역사상 가장 훌륭한 가구 디자인 중 하나”로 꼽은 토네트의 너도밤나무 의자를 애용한 이들은 귀족이나 자본가가 아니었다. 이 의자는 간편한 조립법과 저렴한 운반비 덕에 1860년대부터 유럽 전역의 술집과 카페에 놓여 ‘있어도 없는 듯’ 편하게 쓰였다. 94가지 디자인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상상해 보면 그 가치를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있을 땐, 모른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