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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고기정]북-일 합의후 더 중요해진 시진핑 맞이

입력 | 2014-06-02 03:00:00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최근 일본의 한 정부 관료에게 북-일 접촉 전망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우리는 대북 제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등 주변국의 의사에 반하는 대북 정책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한국보다 더 놀라는 일본의 행태로 미뤄 볼 때 수긍이 갔다.

그러나 지난달 ‘스톡홀름 북-일 합의’는 일본이 대북 문제에서 독자 노선에 나섰음을 보여줬다. 일본은 유엔 차원이 아닌 단독 양자 제재만 해제할 계획이기 때문에 미국 주도의 기존 대북 제재의 틀이 온전히 유지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독자 제재는 그 자체가 따로 떨어져 있던 게 아니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지탱하는 핵심 축이었다. 북-일 합의에서 파생될 제재 구도의 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무엇보다 한반도 문제의 키를 쥔 중국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가 관심을 끌고 있다. 북한은 중국의 안보이익을 실현해주는 핵심 기제다. 미중 관계가 좋아지면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줄어든다. 반면 지금처럼 미국의 대중 압박이 커지면 북한이 아무리 ‘중국의 문 앞에서 말썽을 일으켜도’ 김정은 정권을 내칠 수 없다.

중국은 그동안 북핵 국면에서 미국만 잘 보고 있으면 됐다. 일본은 주요 변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일본이 갑자기 대북 포위망에서 이탈했다. 실은 북한도 중국의 뒤통수를 쳤다. 역사·영토 문제에서 중국의 숙적인 일본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명분에서나 실질에서 북한 정권의 안정을 원한다. 일본의 대북 송금 제한 완화와 교역 재개를 반대할 구실이 없다. 더욱이 중국은 일본이 미국, 한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점에 주목할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관계국 진영이 ‘북한 및 한미일’이라는 2개 그룹에서 ‘북한, 일본, 한미’ 또는 ‘북한+일본, 한미’로 분화되는 데다 한미일 대북 공조의 이완이 한미일 대중 공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어서다.

물론 중국은 북-일 접촉으로 자국의 대북 통제가 약화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북-일이 가까워질수록 다양한 수단을 통해 북한에 대한 구심력을 강화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박근혜 정부 들어 가까스로 복원해 놓은 한중 관계가 다시 악화되거나, 한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중국에 매달리는 악성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은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서 돌출행동을 하는 게 부담스럽지만 중국 변수 때문에 적극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한국만 난처한 상황으로 몰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조만간 한국을 방문한다.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찾은 중국 지도자로 기록될 것 같다. 한국에 와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한중이 1992년 수교 뒤 지금까지 유독 안보협력 분야에서 답보했던 데서 알 수 있듯 양국 관계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근원적 장애가 존재한다. 미국과 북한이라는 변수 때문이다. 시 주석이 평양을 먼저 가느냐, 서울을 먼저 가느냐는 본질의 측면에서 중요하지 않다. 외교정책이 바뀌지 않더라도 외교의 양태는 변할 수 있다.

시 주석의 방한이 “북핵 공동 대응 강화” “경제협력 확대” 등 기시감 있는 수사로 끝나선 안 된다. 우리는 일본이 만들고 있는 새 한반도 구도에 중국이 어떻게 개입하려 하는지, 이런 중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등을 시 주석을 통해 읽어 내고 우리의 요구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평양보다 서울을 먼저 방문하는 시 주석의 행보에 취해 있기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의 변화가 급박하고 심각하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