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18>78세 현장 복귀 김영기 KBL 총재
그렇게 시작된 농구와의 인연이 60년 넘는 세월을 관통할 줄 누가 알았을까. 7월 1일부터 3년 임기를 시작하는 김영기 한국농구연맹(KBL) 신임 총재(78) 얘기다. 지난달 23일 KBL 10개 팀 구단주의 의결 기관인 총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그를 지난주 서울 종로구의 한 순두부 식당에서 만났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나타난 김 총재는 자신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기자를 향해 “김 형이 한발 빨랐다”며 웃었다.
김 총재는 한국 농구의 살아 있는 역사다. 스타 선수로 이름을 날리며 올림픽에 두 차례 출전했다. 1969년 33세로 남자 농구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의 사상 첫 아시아선수권 우승과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 금메달을 이끌었다. 1970년대 기업은행 지점장과 신용보증기금 전무 등을 거쳐 신보투자 대표를 지내면서도 농구와의 끈을 유지했다. 1980년대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서울올림픽 유치 활동에 뛰어든 뒤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KBL 전무 부회장 총재 등을 역임했다. KBL 고문으로 있던 그는 이번에 KBL 총재 제안을 받고는 처음엔 고사했다. “나이가 몇인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 중반 KBL 창립과 프로농구 출범을 주도한 건 바로 김 총재였다. 1997년 시작된 프로농구가 뜨거운 인기로 단기간에 자리를 잡고 서울 강남 한복판에 수백억 원 가치의 KBL 사옥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KBL 총재였던 2004년 그는 판정 시비로 몰수 게임 사태가 일어난 뒤 책임을 통감한다며 홀연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10년 만에 KBL 총재로 컴백한 그의 어깨는 무겁다. “언제부터인가 코트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 나쁜 플레이가 좋은 플레이를 몰아내면서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평소 김 총재는 빠른 농구를 지향하고 고의 파울과 할리우드 액션 같은 비신사적인 플레이는 지양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그가 그려 나갈 코트의 밑그림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얼마 전 프로농구 시상식에 갔더니 심판상 수상자가 야유를 듣더라. 신뢰받는 심판이 중요한데 너무 안타까웠다. 지도자도 명품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보다 경기 시간이 8분 더 긴 미국프로농구(NBA)의 평균 득점은 100∼105점이다. 한국도 경기 시간에 비례해 NBA의 83.3%인 85점 이상은 나와야 하는데 70점 넘기도 힘들다. 이래선 안 된다.”
구체적인 데이터까지 짚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서 세월을 거스르는 열의가 느껴졌다. 비결을 물었더니 “뭔가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심신이 건강해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내에 약속이 있으면 늘 전철을 타고 걸어 다닌다. 하루에 8000보 이상 걷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후 5시 전후로 저녁을 먹는다.” 그러면서 김 총재는 수첩을 꺼내 보여줬다. 첫 장부터 끝까지 검은색 볼펜으로 깨알같이 적은 영어 표현이 담겨 있었다. “늘 다니면서 반복해 읽고 외운다. 1주일에 영문 추리소설을 한 권씩 읽고 있다.” 그는 2년 전 골퍼라면 누구나 동경한다는 에이지 슛(자신의 나이와 같거나 적은 스코어를 기록)을 달성했다. 만 76세 때 76타를 친 것이다. 골프 실력뿐 아니라 고령에도 탄탄한 체력을 지녀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농구 선수, 지도자, 금융인, 스포츠 행정가로 연이어 성공의 길을 걸었던 김 총재는 “뭘 하든 스포츠맨십만큼은 지켰다. 규칙을 준수하고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다. 직장에 출근할 때도 경기하러 가는 마음가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5년 밖에 안 한 농구 감독이 가장 힘들었다. 선수 앞에서 모범을 보이고 감정을 조절하면서 선수들의 재주를 최대한 살려주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던 김 총재 곁에 2시간 넘게 있다 보니 북적거리던 식당은 어느새 한산해져 손님은 한 테이블만 남았다. 점심을 들던 식당 아주머니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차 한잔하면서 마저 하지.” 김 총재는 맥박수가 180까지 치솟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냉철한 판단으로 볼을 넣고 상대를 막아야 하는 게 농구의 매력이라고 했다. 고통 끝에 희열을 맛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는 그의 열정은 10대 시절만큼이나 뜨거웠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