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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기자의 히트&런]의리 잃은 프로에 ‘의리 20년’

입력 | 2014-06-05 03:00:00


1일 두산과 롯데의 잠실 경기에서 윤윤수 휠라 회장이 시구를 하고 있다. 두산 제공


배우 김보성이 ‘의리(으리)’를 외친 지는 10년도 넘었지만 ‘의리’가 대세가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세상이 얼마나 각박하고 불신이 판쳤으면 김보성이 외치는 ‘의리’ 일성에 전 국민이 열광할까 싶다.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야구도 마찬가지다. 야구계는 의리라는 두 글자와 익숙하지 않다.

잘나가는 감독이 있었다. 성적이 좋고 선수들도 잘 키우자 구단 안팎에서 ‘평생 감독으로 모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이듬해 성적이 죽을 쑤자 단숨에 무능력한 사람이 돼 버렸다. 결과는 자진 사퇴를 빙자한 경질이었다. “내게는 아버지 같은 감독님”이라던 선수는 주전에서 밀리는 순간 감독에 대한 뒷담화를 늘어놓기 바쁘다. 의리보다 돈을 쫓아 팀을 옮기는 선수도 많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일이 일상화된 프로야구계에서 20년간 신뢰의 끈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두산과 스포츠용품업체 휠라의 동행이 그렇다. 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과 롯데의 경기는 ‘휠라 데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휠라의 두산 후원 20주년을 기념해 윤윤수 휠라 회장이 시구를 했다. 어떤 기업이 한 스포츠 팀을 20년 연속 후원한 것은 한국 스포츠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의리의 시작은 1994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산은 그해 7위를 했다. 두산은 용품 후원사를 구하려 했지만 성적 안 좋은 팀에 선뜻 물품을 대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당시 손을 내밀었던 게 윤 회장이 사장으로 있던 휠라코리아였다. 두산은 후원 첫해인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년간 양측은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같은 길을 걸었다. 성적이 좋을 때건 안 좋을 때건 휠라는 매년 후원 금액을 늘리며 계약을 연장했다. 두산 역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경쟁업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승영 두산 사장은 “선수들의 다양한 요구를 들어주려고 휠라 직원들이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쌓은 신뢰가 20년 동행의 바탕이 됐다”고 했다.

일례로 2000년대 초반까지 두산의 중심타자로 활약했던 외국인 선수 타이론 우즈는 휠라 제품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어느 날 우즈는 메이저리그 중계에서 왕년의 홈런왕 새미 소사(전 시카고 컵스)가 파란색 휠라 스파이크를 신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소식을 들은 휠라의 한 직원은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소사의 것과 똑같은 스파이크 두 켤레를 구해 우즈에게 전해줬다. 뛸 듯이 기뻐한 우즈는 평소에는 그 스파이크를 곱게 라커룸에 모셔놨다가 중요한 경기에서만 꺼내 신었다고 한다.

양측의 동행에는 ‘사람’의 영향도 컸다. 두산과 휠라에는 첫 인연을 맺었을 당시의 멤버들이 대부분 남아 있다. 마케팅팀 과장이었던 김승영 두산 사장과 정성식 휠라코리아 수석부사장이 그렇다. 김태준 두산 홍보팀장과 김영준 휠라코리아 스포츠마케팅 팀장은 당시 신입사원이었다.

정승욱 휠라코리아 이사는 “두산과 휠라는 부부 사이 같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항상 서로 존중하면서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김승영 사장도 “20년간 우리도 휠라도 함께 성장, 발전한 게 큰 의미가 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주셔서 우리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은혼식까지는 5년밖에 남지 않았다. 어쩌면 양측의 금혼식까지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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