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10년] 1호 입주 CEO들이 말하는 10년
2004년 개성공단 1단계 사업부지(330만 ㎡)에서 터를 닦는 작업을 하는 모습. 10년이 지난 지난 2014년 6월 현재 이곳에는 123개 업체가 입주해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개성공단에 첫 돌을 놓은 것도, 남북관계에 찬바람이 쌩쌩 불 때 북한 노동자들과 살을 맞대고 정을 나누는 것도 우리들입니다. 통일도 결국 우리들 손에서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개성공단은 남한의 자본 및 기술과 북한 노동력의 결합을 통해 높은 경제적 효과가 예상됐다. 하지만 개성공단 1호 기업인들은 경제적 이익은 1차적 목표였을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북한 땅에 처음 들어간 이들의 가슴에는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한 남북 화해’라는 더 큰 그림이 있었다.
에스제이테크 유창근 회장은 “개성공단 1호 기업들은 대부분 ‘머지않은 시간 안에 통일이 될 것이며 통일에 개성공단 모델이 큰 역할을 할 것’이란 믿음으로 입주를 결심했다”며 “한 민족 간의 거래이니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갈 염려도 없고 남북 국가경쟁력을 함께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애초에 개성공단이란 씨앗을 뿌린 것은 현대그룹이었다. 1989년 1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남한 기업인 최초로 북한을 공식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채택했다. 이어 2000년 8월 개성 시내에 총 1억3200만여 m²(4000만 평) 규모의 공단을 조성하겠다는 ‘개성공단 종합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약 4년이 지난 2004년 6월 14일 첫 분양계약이 체결된 뒤 30일에는 개성공단 준공식이 열렸다. 그해 12월 소노코쿠진웨어(당시 리빙아트)가 첫 제품인 ‘통일 냄비’를 생산했다.
○ ‘기계를 다뤄본 적 없는 노동자’
하지만 출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북한 근로자들은 손재주가 좋고 근로 의욕도 높았지만 초기 교육비용이 많이 들었다. 근로자들 대부분이 기계를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었다. 당시 섬유와 신발, 전기·전자, 금속·기계조립 등이 대표적 입주 업종이었는데 작업 과정의 80∼90%가 기계화된 한국 생산시설에 대해 북한 근로자들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기업 CEO들은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 교재를 만들었다. 기계 관리부터 품질 기준, 생산 방법 등 하나부터 열까지 매뉴얼을 만들었고 매일 아침 전 직원을 상대로 학교처럼 수업을 하기도 했다.
○ 남북관계라는 풀리지 않는 숙제
‘풀리지 않는 숙제’인 남북관계는 늘 입주기업들을 괴롭혔다. 남북관계가 조금만 경색돼도 해외 바이어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재철 제씨콤 회장은 “지난해 가동 중단 사태 당시 해외 바이어의 70%가 이탈하면서 전체 주문량이 60% 줄었다”며 “재가동 이후 생산량이 이전의 70% 수준까지 회복했지만 불신이 깊어진 바이어들의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에도 북한의 핵실험 징후가 보이면서 바이어들이 흔들리고 있다. 윤성석 티에스테크놀로지 사장은 “양측 정부가 개성공단이 다시는 정치적 상황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밝혔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개성공단 폐쇄 사태를 역전의 계기로 삼은 기업도 있다. 개성공단이 가동을 중단하자 문창섭 삼덕통상 회장은 부산과 톈진(天津) 공장만으로는 도저히 물량을 맞출 수 없었다. 결국 중국에 있는 30∼40개 공장을 일일이 수소문해 대체 생산을 시작했다. 문 회장은 “동남아 지역으로 물량을 돌리려는 바이어들을 잡기 위해 다른 공장에 웃돈을 얹어주며 생산해 70∼80%는 납기를 맞췄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독일 미앤프렌즈와 개성공단에 합작투자를 하는 데 뜻을 모았다. 문 회장은 “손해를 봤지만 납기를 맞춘다는 신뢰를 얻은 덕분에 합작투자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유현 기자 yhkang@donga.com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