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교수
철학을 '쉽게 설명하는 것'과 '어렵게 설명하는 것'의 차이가 무얼까. 철학이 쉬워지면 나를 지탱해 주는 '피와 살'이 되지만 어려우면 '그림 속 사과'가 아닐까. 두 얼굴의 철학이 인문학 열풍이라는 마차를 타고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철학이 무엇이고 왜 철학을 알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철학은 '친구'가 된다. 요즘 철학을 '손에 잡히게 해주는' 철학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중의 한 명인 최진석 서강대 교수를 만나봤다.
강의가 울림이 되다.
기자는 지난 5월 말 서강대 장하상관 118호에서 최진석 철학과 교수의 '철학산책' 강의를 들었다. 최 교수를 인터뷰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한 공부였는데 철학에 몰두하는 학생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철학은 이미 그들에게 친숙한 듯했고 '철학의 시작은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의심에서 시작된다'라는 '기초'가 이미 닦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청바지에 스니커즈 운동화. 스포츠형 백발 차림의 최 교수는 강의에 아무것도 들고가지 않는다. 강의는 '몸'으로 한다. 80명의 수강생들에게 철학은 더이상 지겨운 학문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울림을 주는 '철학'이었다.
수강생 김초윤 씨(신방 4)에게 물었다. 최 교수의 강의는 왜 귀에 쏙쏙 들어오는가. "평이한 말로 설명하기에 초보자도 이해하기 쉽고, 강의를 들으면서 울림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울림이라고? 울림 때문에 학생들이 몰두하고 마니아층까지 생겼단 말인가. 그러나 김 씨의 해석은 약간 달랐다. 그는 "교수님이 강조하시는 건 '욕망'이에요. 자기만을 위한 게 아니라 나와 남을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는 욕망을 찾으라고 말씀하시죠. 제대로 된 욕망을 찾으려면 남의 기준보다는 나의 기준으로 세상을 더 넓게 봐야 된다고 항상 말씀하신다"고 했다. 알 듯 모를 듯하다. 김 씨는 "한 학기 동안 철학산책의 가장 큰 수확은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라고도 했다. 기자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욕망'조차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울림'을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30여 년 전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기자는 철학에 덴 적이 있다. 200명이 넘는 수강생들이 교양필수인 '철학개론'을 들었지만 몇 명만이 강의에 열중했다. 도대체 교수님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흥미가 있을 리 없었다. '너희들이 앉아있는 책상이 실제는 책상이 아니다'라는 '오묘한 명제'를 나만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죽을 쑨' 성적표를 받은 건 당연했다.
만약 기자에게 '왜 철학을 배워야 하는지'를 말해 준 후 개념들을 설명했더라면 달라졌을지 모른다. 대학시절 배웠던 철학에 대한 느낌은 '달'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이해 못하고 헤매기만 했다는 기억뿐이다. 기자가 옛 경험을 들춘 것은 아쉬움 때문이다. 최 교수는 인문학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고 풀어 설명한다. 기자도 20대 때부터 인간이 그려왔던 무늬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풍성한 삶을 살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철학을 알면 물건이 아닌 '장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최 교수의 주장이다. '철학은 인간 사고의 큰 흐름을 알게 해주는 통찰력을 제공하기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문화를 창조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세계를 흔든 최고경영자(CEO)들은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았다"며 "흐름을 꿰뚫고 있으면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창조"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철학의 진수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외국 철학자들의 말만 해석한 '훈고 철학'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라며 "제대로 철학을 할 때라야 우리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독특한 분석도 내놓는다.
김승수 씨(신방 3)는 "지난 50년간 대한민국은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응용학문들만 각광을 받아왔다. 선진국들은 인문학 바탕 위에 경제학 경영학 등을 발전시켜 새로운 흐름을 계속 만들어 왔지만 우리는 인문학의 기초가 너무 빈약해 토대조차 쌓지 못하고 선진국 뒤만 따라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철학 같은 인문학에 관심을 두면 우리도 달라질 수 있다"며 최 교수의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최 교수는 기자에게 "인터뷰 하기 전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읽고 올 것"을 당부했다. 기자는 이 책을 본 후 최 교수에게 "지금까지 헷갈렸던 여러 철학적 개념들이 정리 돼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책 오른쪽은 최 교수의 독특한 사인.
기자는 최 교수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주고 있음을 황준수 씨(영미문학 1)를 인터뷰하면서 새삼 확인했다.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황 씨가 "신념을 고수하는 건 좋지만 갇히면 안 된다. 딱 그만큼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미문학을 전공하는 인문학도의 자세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옹골차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글.사진 이종승 콘텐츠기획본부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