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즘’ 창시자 서양화가 김흥수 화백
음양사상을 기반으로 ‘하모니즘’을 창시한 김흥수 화백. 천부적 재능과 뜨거운 열정으로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삶과 예술을 남기고 떠났다. 동아일보DB
구상과 추상이 공존한 ‘하모니즘’의 창시자로, 파격적 인생행보로 주목받은 원로화가 김 화백이 9일 오전 3시 15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유족은 “새벽에 잠깐 깨어나 물을 마신 뒤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191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함흥고보 시절인 17세 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했고 일본 도쿄예술대에서 공부했다. 1949년 국전에서 누드군상으로 입선했으나 풍기문란으로 그림이 철거되는 논란을 빚었다. 종군화가로 활동한 그는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61년 귀국해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냈다. 서울대, 성신여대, 덕성여대 등에서 후학을 길렀고 1998년 예술의 전당에서 ‘김흥수 화백의 꿈나무 교실’을 열어 어린이를 위한 미술교육에 새 장을 열었다.
왕성한 창작과 성에 대한 개방적 사고로 ‘한국의 피카소’라 불렸던 김흥수 화백의 작품.
흰 양복에 빨강 셔츠처럼 시선을 끄는 옷차림에 턱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던 그는 예술뿐 아니라 삶에서도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1961년 성(性)을 주제로 한 ‘체험론적 여성론’을 연재한 것은 세간의 화제였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에 이어 장수현 씨와 8년여 동거 끝에 1992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덕성여대 시절 사제지간으로 만난 사이였다. 아내는 남편을 ‘국보급 화가’라고 했고, 남편은 아내를 ‘예술의 영원한 동반자’로 불렀다.
2012년 장 씨가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상심한 노화가. 휠체어에 의지할 만큼 기력이 쇠하고 거동은 불편해졌으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였다. ‘풍산개’를 연출한 외손자 전재홍 감독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으면서도 예술과 자기 관리에 엄격했던 분”이라며 “좋은 예술을 하기 위해선 좋은 정신을 가져야 한다며 술 담배를 절제하라고 늘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지금에야 정신이 맑아지고 예술에 대해 좀 알 것 같은데 몸은 이미 노인이 돼버려 너무 아쉽다”고 말했던 고인. 이제 그리던 아내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났다. 유족은 3남 1녀.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 발인은 13일 오전. 02-2072-2011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