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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재난서 발가벗겨진 ‘인간의 가면’

입력 | 2014-06-10 03:00:00

동일본 대지진 다룬 ‘배수의 고도’
아비규환속 약탈 등 민낯 생생히 묘사




연극 ‘배수의 고도’에서 동일본 대지진 후 살아남은 자와 그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취재진. 3년 전 일본의 모습과 세월호 참사를 겪은 지금 한국의 모습은 상당 부분 겹쳐진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극한의 재난을 당한 인간의 민낯이 처절하게 드러난다.

10일 시작하는 연극 ‘배수의 고도’(나카쓰루 아키히토 극본·김재엽 연출)는 동일본 대지진 후 피해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실제 피해자를 취재한 뒤 작품을 썼다. 경제를 떠받치기 위해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맹렬하게 충돌하는 상황도 작가의 상상을 통해 조명했다. 최근 연습이 한창이던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재난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 배우, 연출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이 벌어진 후 그해 9월에 이 작품이 일본에서 공연됐는데, 객석이 울음바다가 됐다고 해요. 올해 2월 대본을 받았을 때는 작품의 감정선이 단조롭다고 느꼈는데, 세월호 사건을 겪고 보니 그게 어떤 감정인지 진심으로 이해가 되더라고요.”(선종남·카타오카 다이고 역)

“인간은 가면을 여러 겹 쓰고 살아가는데 재난은 이 가면을 한 겹도 남김없이 벗겨버려요. 서로의 맨 얼굴을 단체로 보는 건 재난을 넘어 재앙이라고 생각해요.”(이정수·알렉스 역)

대지진이 벌어진 당일 사람들은 아비규환 속에 본능대로 행동한다. 극 중 고등학생인 타이요(김시유 역)는 통조림을 훔쳐 팔다 발각된다. 타이요는 “그날은 뭘 해도 용서가 됐다. 아직도 그날과 달라진 게 없는데 지금은 왜 안 되냐”고 절규한다. 인간의 격(格)이 무너질 때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이 작품은 생생히 보여준다.

김재엽 연출가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연민이 또 다른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지만 세월호 유가족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눈빛조차 상처를 줄 수 있어요.”

피폭자가 된 안도 쇼코 역의 이진희도 “피폭자임을 알게 된 사람이 가엾은 표정으로 ‘그랬구나’ 하고 바라보는 게 ‘후쿠시마 출신이었어?’라며 놀라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연습 현장에서 만난 연출자와 배우들은 극 중에서는 물론 현실에서도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와 자원봉사자, 원전 찬성파와 반대파, 피폭자와 일반인 등 서로 다른 사람들이 나와요. 우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만들죠. 서로의 입장 차이를 알아야 비로소 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하다는 메시지는 현실에서도 유효하다고 생각해요.”(김재엽)

“누가 옳고 그른지 규정짓기보다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물음표를 계속 던졌으면 좋겠어요.”(김승언·모리무라 토오루 역)

10일∼7월 5일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3만 원, 02-708-5001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