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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 음식강산]볼때기 미어터진다! 꽃보다 쌈밥

입력 | 2014-06-11 03:00:00


층층이 피었던 산딸나무꽃이 가뭇없이 이울었다. 희고 노란 바람개비 마삭줄꽃도 숙지고 있다. 담벼락의 붉은 장미꽃만 웅긋쭝긋 너울댄다. 덥다. 몸이 축축 처진다. 입안이 영 탑탑하다. 생고무 씹은 듯 타분하고 모름하다.

그렇다. 대책 없이 쌈밥이 ‘땡긴다’. 한민족은 배달민족인가? 아니다. 그 이전에 ‘쌈밥민족’이다. 국내 항공사 기내식으로 된장쌈밥이 등장했을 정도다. 서로 쌈밥을 싸서 상대 입에 넣어주기까지 한다. 외국인들은 질겁한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북한에선 ‘닭알 쌈밥’이란 것도 있다. 계란덮밥을 일컫는 말이다.

한민족은 이파리라면 뭐든 싸서 잘도 먹는다. 텃밭채소, 들풀, 산나물, 바다풀 가리지 않는다. 상추 쑥갓 가지잎 머위잎 호박잎 연잎 시금치 아욱 배추속대 곰취 배추 깻잎 고구마잎 콩잎 참나무잎 참죽잎 묵은지 치커리 미나리 김 미역 다시마….

내용물은 뭐든 좋다. 쌀밥 보리밥 오곡밥 현미밥 흑미밥 돌솥밥 삼겹살 등심 오리고기 생선 멍게 전복 문어 오징어 젓갈 멸치 강된장 생마늘…. 둘둘 싸서 볼때기가 터져라 밀어 넣는다.

상추는 야들야들, 호박잎은 꺼끌꺼끌, 곰취는 두툼하고, 머위잎은 푹신하다. 곰취나 머위쌈은 혀끝에 살짝 걸리는 쌉싸래한 맛이 개운하다. 호박잎은 목구멍을 간질간질 쓸고 내려가는 맛이 짜릿하다. 뭐니 뭐니 해도 호박잎은 밥 뜸들일 때, 밥물에 쪄야 제 맛이다. 밥물이 밴 호박잎이나 머위잎은 시르죽은 혀끝에 아연 생기를 돋운다. 양배추는 끓는 물에 삶아 찬물에 헹군 뒤, 물기를 꼭 짜서 싸먹는다. 햐아, 꼬소롬하다.

쌈밥은 입안에서 봄날 벚꽃처럼 화사하게 폭발한다. ‘입속의 비빔밥’이다. 온갖 맛이 뒤죽박죽 어우러져 자지러진다. 와삭와삭 채소 이파리의 풋풋한 맛에 강된장의 짭조름 구수한 맛, 갑자기 우지끈 깨물리며 콧속을 톡 쏘는 마늘맛, 솔솔 풍기는 삼겹살의 고소한 맛, 쑥갓의 상큼하고 향긋한 맛….

‘“이것 좀 먹어 봐” 평상에 둘러앉아/강된장에 고기 한점 밥 한술에 풋고추 한입/두 볼이 미어터지도록 상추쌈을 싸주셨죠//달보드레 감치는 아버지 그 상추쌈은/이제 어디가도 먹을 순 없지만요/마지막 상추 따던 웃음소리 환히 남아 있어요’(홍성란 ‘상추쌈’에서)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오종종 피어난 고향 마당 평상. 초저녁 매캐한 모깃불 냄새. 누렁이 밥그릇에 뜬 초롱초롱 개밥바라기별. 온 식구 둘러앉아 볼따구니가 터져라 먹던 상추쌈밥. 누나와 눈 흘기며 먹다가, 그만 웃음보가 터져, 산산이 터져 나왔던 쌈밥 파편들.

서울 도심에도 쌈밥집은 흔하다. 요즘엔 아예 만두처럼 미리 싸서 나오는 쌈밥집도 많다. 데친 곰취나 호박잎으로 흑미밥을 둘둘 말아 보기 좋게 싸서 내놓는다. 맨드리 고운 ‘푸른 만두쌈’이라고나 할까. 채소 ‘주먹쌈밥’이라고나 할까. 여성들에게 인기다. 2, 3개만 먹으면 점심 끝.

휴일엔 남한강 경기 양평 부근으로 쌈밥점심 나들이를 즐기는 이들도 많다. 용문사 입구 용문산농장 쌈밥마을(031-771-8389)은 발 디딜 틈이 없다. 경북 경주엔 아예 쌈밥골목이 있다. 이풍녀 구로쌈밥(054-749-0600) 교동쌈밥(054-773-3322) 등에 관광객 발길이 잦다.

전북 고창 읍내 정통옛날쌈밥집(063-564-3618)도 잊을 수 없다. 식탁 6개의 소박한 가게. 나이 지긋한 부부가 정갈하게 차려낸다. 되직한 우렁강된장, 칼칼한 애호박두부된장찌개, 대소쿠리에 하얀 천을 깔고 그 위에 노란 좁쌀이 섞인 구뜰한 보리밥과 고슬고슬한 쌀밥. 밑반찬이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

경남 남해의 멸치쌈밥도 요즘이 제철이다. 멸치가 손가락만 해서 뼈가 연하다. 갓 잡은 멸치를 자글자글 조려서 상추나 깻잎으로 싸먹는다. 밥 한술과 달콤한 남해마늘을 얹어 먹으면 오호, 세상에! 창선교 부근의 여원(055-867-4118)과 단골식당(055-867-4673)이 이름났다.

상추는 채소의 대장이다. 상추쌈은 ‘국민 쌈’이다. 베란다의 화분 몇 개면 한여름 네 식구가 실컷 뜯어 먹는다. 아앙∼ 입이 찢어져라 벌리고 먹어야 복이 덩굴째 들어온다. 정월대보름날 먹는 ‘복쌈’이 그것이다. 조선 선비들도 상추쌈을 즐겼다. 실학자 유득공(1749∼1807)은 시까지 지었다. 하지만 선비 체면에 차마 ‘입을 좌악∼ 벌리며 먹는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저 ‘밥숟갈 크기’로 얼버무렸다. 그렇다. 누가 뭐래도 ‘양반보다 상추쌈’이다.

‘밥숟갈 크기는 입 벌릴 만큼/상추 잎 크기는 손 안에 맞춰/쌈장에다 생선회도 곁들여 얹고/부추에다 하얀 파도 섞어 싼 쌈이/오므린 모양새는 꽃봉오리요/주름 잡힌 모양은 피지 않은 연꽃//손에 쥐여 있을 때는 주머니더니/입에 넣고 먹으려니 북 모양일세/사근사근 맛있게도 씹히는 소리/침에 젖어 위 속에서 잘도 삭겠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