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논설위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몽주의의 산물인 ‘역사의 진보’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바꿨다.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필연적 법칙이며 극좌 이념이 진보라는 그들의 주장과 실험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동유럽권 공산주의가 몰락한 1990년대 초반 러시아에서는 서구식 체제로의 변화를 열망하던 목소리가 ‘진보와 개혁’이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을 전후해 벌어진 중국 권력투쟁에서 극좌를 고집한 4인방 세력을 진보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가까이는 휴전선 이북의 북한에서 3대 세습독재의 과실을 누리는 권력층이 진보적인가, 아니면 참혹한 현실을 깨려는 노력이 진보적인가.
세계적 조류와 거꾸로 한국에서는 우파와 좌파 대신에 보수와 진보라는 말이 득세한다. 친(親)전교조 교육감 전성시대를 앞두고 이런 풍조는 더 심해졌다. 진보라는 표현은 누가 봐도 보수보다 매력적이다. 좌파가 스스로를 ‘진보’로 포장해 도덕적 고지(高地)를 선점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들을 존중한다는 사람들이 그들의 용어 프레임을 비판적 성찰 없이 수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한국의 좌파 중에도 평가할 만한 사람이 적지 않다. 민주노동당의 친북 노선을 비판하면서 탈당한 뒤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신(新)좌파’를 주창한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노동운동을 오래 했지만 대기업과 공기업 노조의 탐욕을 질타하는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이 대표적이다. 사안별로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삶의 행적과 진지함, 여러 형태의 허위와 위선을 배격하는 자세가 돋보인다.
반면 사회 각계에서 ‘잘나가는’ 한국의 좌파 중에는 말과 생활 사이에 괴리가 큰 사람이 많다. 자기편이 아니면 온갖 침소봉대로 공격하면서도 ‘내 편’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감싸기에 급급한 이중기준도 몸에 뱄다. 대한민국에는 한없이 가혹하고 북한 정권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것도 이들의 한 특징이다. 정책과 삶에 대한 평가는 다 제쳐두고라도 저 폭압적인 북한 인권 상황을 외면하는 퇴행적 한국 좌파 세력에 진보라는 훈장을 달아줄 순 없다.
암과 싸우면서도 집필에 혼신의 힘을 쏟는 복거일 선생은 2005년 펴낸 ‘조심스러운 낙관’에서 “우리 체제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보수, 그것을 허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진보로 부르는 관행은 명백한 잘못”이라며 전통적인 구분인 우파와 좌파, 또는 친(親)체제와 반(反)체제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원로 정치학자 오병헌 박사도 2011년 출간한 ‘한국의 좌파’에서 “북한 정권과 종북 좌파를 진보세력으로 부르는 것은 완전한 오칭(誤稱)”이라며 “이들은 진보세력이 아니라 퇴보세력이나 파괴세력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강조했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