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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셰익스피어를 흠모한 ‘한국연극의 대부’

입력 | 2014-06-13 03:00:00

1세대 연극평론가 여석기 고려대 명예교수




동아일보DB

1세대 연극평론가로 한국 연극의 현대화에 기여한 여석기 고려대 명예교수(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사진)가 교통사고로 12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고인은 경북 김천 출신으로 서울대 영문학과를 나와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며 한국 현대연극의 기반을 구축했다. 1960년대부터 극작워크숍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박조열 윤대성 노경식 오태석 등 대표적인 극작가와 연출가가 배출됐다. 윤대성 씨는 “정기적으로 작품을 꼼꼼하게 보시고 평가해 주시는 한편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작가의 세계로 인도해 주셨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사재를 털어 10년 넘게 계간 ‘연극평론’을 발행하며 본격적인 연극 잡지의 기틀을 다졌다. 이 잡지는 세계 연극의 흐름을 소개하고 한국 연극의 현대화와 새로운 실험에도 주목했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개인적인 선호에 치우침 없이 공정한 시각으로 평론하셨고 포용하시는 마음이 넓은 분이셨다”며 “학문적 연구는 물론 연극 현장에서 필요한 활동까지 함께 하시면서 한국 연극을 이끌어 나가신 큰 어른이셨다”고 말했다. 고인은 최근까지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세계 연극계의 동향을 파악할 정도로 연극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후배 연극인들은 매년 1월 2일에 고인의 자택으로 찾아가 세배를 드리는 ‘일이회’를 만들었다. 1964년 일이회 모임에서 고인은 “올해가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인 해”라고 말했고, 후배들은 즉석에서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페스티벌을 제안했다. 행사는 성황리에 열렸다. 김의경 현대극장 대표는 “상업연극을 경계하고 연극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경종을 울리셨다”며 “예리한 비평으로 유명하시지만 후배들과 자주 술잔을 나누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등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고인은 평생 모은 희곡과 연극 관련 자료 2000여 점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기증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는 고인의 업적을 기려 ‘여석기연극평론가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국민훈장 목련장과 모란장,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은 우리 연극계의 산실인 동아연극상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상이 제정된 1964년부터 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2012년에는 특별상을 수상했다. 고인은 당시 소감에서 “상도 시대와 더불어 변하기 마련인데 동아연극상은 변함없는 우직함을 그대로 지니고 왔다. 기꺼이 이 특별상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그 우직함을 지킨 것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서로 ‘한국연극의 현실’ ‘에세이 셰익스피어 명작선’ ‘햄릿과의 여행 리어와의 만남’ ‘나의 햄릿 강의’를 비롯해 자서전인 ‘여석기 나의 삶, 나의 학문, 나의 연극’이 있다.

유족으로는 아들 여건종 숙명여대 영어영문학부 교수와 딸 경주, 효주 씨, 사위인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 노부호 서강대 명예교수, 며느리인 강혜순 대림대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로 삼성서울병원, 발인 15일 오전 8시. 02-3410-3151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