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촌 연세로에서 열린 ‘달려라 피아노’ 거리 공연 현장. 달려라 피아노 페이스북 캡처
남자가 연주를 마치고 일어나자 다른 20대 남자가 바로 이어받아 스티비 원더의 ‘Isn't she lovely’를 직접 연주하며 열창했다. 여성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초등학교 시절 ‘바이엘 하’까지 쳤던 게 피아노 경력의 전부인 기자마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심이 들 정도였다. 연주자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선유도의 밤은 음악과 박수갈채 속에 깊어갔다.
선유도에 놓인 이 피아노는 누구나 무료로 칠 수 있다. 비영리단체 ‘달려라 피아노’가 시민에게서 기증받아 서울 곳곳에 설치해둔 피아노 중 하나다. 달려라 피아노는 가정과 학교 등에서 애물단지가 된 낡은 피아노를 기증받아 새로 색을 칠한 다음 거리에 전시하고 있다. 어렸을 때 피아노학원 한 번쯤은 다녀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건반을 칠 기회가 점점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던 이들이 거리의 피아노에 열광하고 있다. 사실 어릴 때 체르니 40번까지 배웠어도 성인이 된 후엔 써먹을 일이 좀처럼 없지 않은가.
자원봉사로 달려라 피아노 행사를 기획하는 이들은 ‘연세로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1일까지 신촌 연세로 차 없는 거리에 피아노 10대를 가져다 놨는데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페이스북에 올린 길거리 공연 사진에 9만여 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1만8000여 명이 댓글을 달며 응원했다. SNS에는 오랜만에 잡은 건반에 설레어 연주 장면 사진을 찍어 올린 ‘인증샷’이나 타인의 길거리 연주를 찍은 사진이 수백 장 쏟아졌다.
기자는 그날 현장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장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고 한다. 당초 오후 10시까지만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연주 신청자가 줄을 이어 다음 날 오전 2시가 넘어서야 피아노 덮개를 덮었다. 처음엔 주위 눈치를 보며 연주를 주저하던 시민들이 어느새 너도나도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 남자 대학생은 드라마 ‘파리의 연인’(2004년) 속 박신양처럼 피아노를 치며 연인에게 노래로 사랑을 고백했다. 처음 만난 남녀가 ‘젓가락 행진곡’을 같이 치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한 노숙인은 피아노 소리를 듣고 달려와 두 팔을 벌려 우스꽝스럽게 즉석 지휘를 해 웃음을 안겨줬다.
재능기부에 나선 전문 연주가들도 생소한 길거리 연주에 열광했다. 피아니스트 조하영 씨는 “연주 도중 갑자기 어린아이가 옆에 와서 앉더라고요.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런 게 길거리 연주의 묘미”라면서 “연주를 마치자 남성 2명이 연락처를 물어봤다”며 수줍게 웃었다.
드라마에선 꼭 남자 주인공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정장을 차려입고 그랜드 피아노를 치며 사랑 고백을 한다. 여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뭇 남자들은 비싼 돈을 내고 고급 레스토랑에 가야 하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조동주 사회부 기자 dj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