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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이순신, 총탄 맞고도 의연”

입력 | 2014-06-16 03:00:00

김시덕 교수 책 ‘그림이 된 임진왜란’… 日 고문헌 속 ‘위풍당당 충무공’ 밝혀




19세기 중기 일본에서 간행된 ‘조선정벌기’에 목판화로 찍어 게재한 이순신 삽화. 머리를 풀어헤치고 수염이 텁수룩한 모습이 전혀 ‘조선인’답지 않지만, 총에 맞아 피가 솟구치는데도 흔들림 없는 위대한 장군을 그리려 노력했음을 엿볼 수 있다. 학고재 제공

“하루는 전투를 독려하다 적의 유탄에 왼쪽 어깨를 맞아 피가 팔꿈치까지 흘렀다. 그러나 장군은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전투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칼로 살을 찢고 탄환을 뽑았다. 탄환이 몇 치나 파고들어가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모두 낯빛이 변했다. 그러나 그는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

중국에서 신으로까지 모시는 촉나라 맹장 관우라도 환생한 걸까. 팔 수술을 화타에게 맡기고 바둑을 두던 장면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19세기 중반 간행된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 묘사된 이 대단한 장수는 바로 ‘성웅’ 이순신(1545∼1598)이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최근 출간한 연구서 ‘그림이 된 임진왜란’(학고재)에서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7∼19세기에 일본이 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옛 문헌을 통해 살폈다. 물론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한 수작이 주류지만, 적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에겐 엄청난 존경을 표시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충무공이었다.

장군의 의연함을 칭송한 글과 함께 조선정벌기에 실린 삽화는 이런 일본인의 시각을 여실히 드러냈다. 일본풍이 역력한 그림이나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뱃머리에 선 충무공은 위풍당당했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음에도, 오른손으론 장검을 굳게 잡은 채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충무공에 대한 존경은 다른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승려 세이키(姓貴)가 1705년 펴낸 ‘조선군기대전(朝鮮軍記大全)’과 같은 해 바바 신이(馬場信意)라는 작가가 쓴 ‘조선태평기(朝鮮太平記)’는 장군을 아예 ‘영웅’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는 일본과 대적한 조선과 명나라 인물 가운데 유일한 경우다. 김 교수는 “충무공만큼은 영웅이나 ‘불패의 장군’이라 부르며 일본도 한 수 접고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1800년 당대 인기 작가 아키자토 리토(秋里籬島)가 쓴 ‘에혼 조선군기(繪本 朝鮮軍記)’나 19세기 베스트셀러였던 ‘에혼 다이코기(繪本 太閤記)’는 충무공이 이끈 조선 수군의 용맹함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목판 삽화를 보면 일본 수군이 크게 패하는 장면도 나온다. 두 책 모두 당시 서민이 즐겼던 ‘가벼운 역사평전’인지라 과장이나 왜곡이 있을 법도 한데 사실관계를 상당히 정확하게 전달했다.

김 교수는 일본이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된 배경으로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집필한 ‘징비록(懲毖錄)’의 공이 큰 것으로 분석했다. 일본은 왜란 직후만 해도 일방적인 승리로 미화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징비록을 번역한 ‘조선징비록’이 1695년 교토에서 출간된 이래 상대방의 성과나 인물도 조금씩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본은 이순신 외에 진주성전투의 김시민 장군(1554∼1592)이나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가토 기요마사와 맞섰던 무장 한극함(?∼1593)과 같은 인물도 상당히 우호적으로 그렸다. 김 교수는 “물론 이런 대단한 상대를 이겼다는 우월감이 깔렸긴 해도, 적일지언정 용맹한 장수에겐 존경을 표하는 일본의 ‘무(武) 숭배문화’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번 저서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일본 고문헌의 삽화 300여 점도 국내에 처음 선보였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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