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딸 찾아 납골당에
김 씨는 주섬주섬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 뒤 차를 잡아탔다. 29년 동안 경기 안산시의 작은 전자회사에 다닌 김 씨는 평일인데도 회사가 아니라 경기 화성시의 납골공원으로 향했다. 김 씨는 최근 매일같이 이곳을 찾는다.
“아빠들은 딸을 무지무지 좋아하거든. 그걸 딸들은 몰라….”
세월호 침몰 전 김 씨의 일상은 여느 단란한 가정과 다르지 않았다. 오후 7시쯤 회사에서 퇴근해 아내의 집안일을 도왔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을 먹고, TV를 봤다. 딸은 퇴근이 늦어 잠시 얘기를 나누다 보면 곧 자기 방으로 들어갔지만 애정 표현이 많은 편이 아니었던 초원 씨가 웃기만 해도 김 씨는 종일 기분이 좋았다.
“딸은 가수 서태지를 좋아했어요. 대학 3학년 때도 서태지 콘서트 표를 사줬더니 공주에서 서울까지 와서 공연을 보고 가더군요. 다음 해에 또 사줬죠.”
4월 16일 이후 두 달. 모든 것은 전과 달라졌다. 딸의 시신이 발견되고 며칠 뒤 김 씨는 회사를 그만뒀다. 넋이 나간 듯해 자리에 있어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자주 탈진하고 이유 없이 아팠다. 딸을 데리고 걸어가는 부모들을 보면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계획도, 낙도 없고, 그날이 그날이고,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겠고…. 모든 게 무의미해졌어요. 초원이 남동생도 대학도 졸업시키고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부모들이 자식의 시신을 찾아 안산으로 올라오면 김 씨도 함께 올라와 문상을 했다. 딸이 가르쳤던 제자들의 빈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학부모들과 부둥켜안고 울었다. 학생들 부모보다 나이가 많은 김 씨를 어떤 학부모들은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5일에도 김 씨는 사흘째 진도에 머물고 있었다.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 씨는 남은 실종자들이 하루빨리 발견되기를 기원했다. “대조기라 물살이 세서 걱정이네요. 오늘은 남학생 가방 하나, 여학생 가방 세 개만 올라왔더라고요. 실종자들이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요….”
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