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 물심양면 도운 ‘正義使者’ 최기영 서강대 교수 논문서 조명
위빈 주교의 젊은 시절 모습.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항일전쟁의 동지로 여겼던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일이라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한중(韓中)연대의 상징이었던 위 주교를 ‘중국 십자군의 통수’, ‘난세의 정의사자’라고 불렀다. 구글 이미지
위 주교에 대한 김구의 존경심은 194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에서도 확인된다. 김구는 이 날짜 기사에서 “(위 주교가) 포츠담 회의에서 장제스 (중국 국민정부) 주석의 고문 자격으로 참석해 ‘조선 민족에게 독립을 주어야 한다’고 외쳤다”며 그를 ‘조선 독립의 숨은 은인’으로 소개했다.
위 주교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김구에게 이런 찬사를 받았던 걸까. 최기영 서강대 교수(사학)는 논문 ‘우빈 주교와 한국독립운동’에서 위 주교와 한국 독립운동의 인연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이 논문은 8월 발간되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논집에 실릴 예정이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위빈 주교를 ‘조선독립 공약의 숨은 은인’으로 회고한 본보 1945년 12월 29일자 기사. 동아일보DB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서 “정의와 공정함이라는 하느님의 진리로 무장한 광복군이 최종 승리할 것”이라며 광복군의 앞날을 축복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중국 천주교의 정신적 지주로 훗날 중국의 두 번째 추기경이 되는 그는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천주교 신문 ‘익세보’(1940년 11월 12일자)를 통해 “350만 중국 천주교 신도들은 한국 광복운동에 협조하라”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장제스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한인이 많이 사는 만주에 (항일) 유격대를 파견하라고 국민당 정부에 요구했고, 김구 등 임시정부 관계자와 장제스의 만남도 주선했다.
1943년 3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그를 재미 한인들은 ‘국빈’으로 맞이했다. 그들은 영문과 한문으로 ‘하늘이 위인을 내려 보내사 난세의 정의사자가 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은제 성찬배를 만들어 위 주교에게 선물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중국 정부 안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논의가 나오자 승인을 적극 주장했고, 1945년 4월 연합국 50개 나라 대표단이 2차 대전 전후처리 방향을 논의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임시정부 대표단이 회의 참석을 거부당하자 마치 자기 일처럼 중국 등 외국 대표단장을 설득하려 했다.
최 교수는 “김구는 위 주교가 ‘포츠담 회의’에서 한국 독립문제에 크게 기여했다고 회고했지만, 이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의 활약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며 “위 주교는 포츠담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