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뉴스룸/조진서]자본가의 딜레마

입력 | 2014-06-19 03:00:00


조진서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한국의 재벌 기업들이 직면한 현안 가운데 가장 파괴력이 큰 이슈는 승계 문제, 그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사안은 역시 세금 문제다. 개인이 보유한 회사 지분을 타인에게 양도 혹은 상속하려면 최고 50%의 세금을 내야 한다. 현금이 없다면 주식을 팔아서라도 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경영권의 일부 희석이 불가피하다. 상대적으로 오너 일가의 지분이 적은 한국 기업의 특성을 감안할 때 경영권이 희석되면 지배구조와 관련한 큰 변화가 촉발될 수 있다.

중소기업에는 폐업을 막기 위해 회사 지분에 대해 상속세를 줄여주는 제도가 이미 도입돼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 ‘오너’에겐 그런 혜택이 없다. 대기업 오너에게까지 이런 혜택을 주면 일반 서민은 박탈감을 느낄 수 있고 이에 따른 정치적 저항을 유발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다. 그래서 일부 재벌은 일감 몰아주기 등 세금을 내지 않는 불법적인 방법을 택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런데 경영권 승계의 딜레마를 꼭 세금 문제로 접근할 게 아니라 아예 주식회사라는 제도 자체를 보완해서 풀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사이드경영대학원 원장을 지낸 콜린 마이어 교수는 작년 한국을 방문해 서울대, 연세대, 중앙대 등에서 강연했다. 그는 주식의 수뿐만 아니라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기간에 비례해 주주총회 의결권을 주자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10년을 보유한 주주에게는 1년을 보유한 주주의 10배만큼의 의결권을 주자는 것이다. 장기 투자자일수록 회사의 미래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기 때문에 그만큼 권리도 많이 가져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마이어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주식을 수십 년째 보유하고 있는 창업자 가문의 경영자들은 상속세를 설령 다 냈다 하더라도 충분한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다. 재벌도, 시민들도 환영할 가능성이 있는 제안이다. 물론 특정 가문에만 이런 혜택을 주자는 얘긴 아니다. 마이어 교수는 “한국의 재벌들은 장기 투자자들이다. 하지만 꼭 장기 투자자가 재벌 가족이 돼야 할 필요는 없다. 연기금이나 펀드 등도 얼마든지 좋은 장기 투자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급진적 제안이지만 최근엔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교수도 동의하고 나섰다. 그는 경영전문지 하버드비즈니스리뷰 6월호에 실은 논문에서 마이어 교수가 제시한 방법을 ‘자본목표 재설정’이라 불렀다. 당장 수익을 극대화하라는 단기 투자자의 압력을 완화하고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장기 투자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주식회사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런 논의는 아직까지 학계에 주로 머물고 있긴 하지만 재벌의 경제 집중도가 높은 한국의 정부기관과 기업들은 특히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선진국이란 ‘남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나라’라는 뜻이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제품뿐 아니라 지배구조에서도 세계를 선도하는 모델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조진서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cjs@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