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장석주(1954∼)
어린 시절 공을 차며 내가
중력의 세계에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알아야 할 도덕과 의무가
정강이뼈와 대퇴골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변동과 불연속을 지배하려는
발의 역사가 그렇게 길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초록 잔디 위로 둥근 달이 내려온다.
달의 항로를 좇는 추적자들은
고양이처럼 예민한 신경으로 그 우연의 궤적을
좇고, 숨어서 노려본다.
항상 중요한 순간을 쥔 것은
우연의 신(神)이다. 기회들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왔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굼뜬 동작으로 허둥대다가는 헛발질한다. 헛발질: 수태가 없는 상상임신.
내 발은 공중으로 뜨고
공은 떼구르르르 굴러간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연금술사들은
스물두 개의 그림자를
잔디밭 위에 남긴 채 걸어 나온다.
오, 누가 승리를 말하는가,
이것은 살육과 잔혹 행위가 없는 전쟁,
땀방울과 질주, 우연들의 날뜀,
궁극의 평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브라질 만화가 마우리시우 지 소자의 작품
당시 경기를 마친 뒤 탈의실에 들어선 그는 자국에 생중계되는 국영방송 카메라 앞에 무릎 꿇고 호소했다. 일주일만이라도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춰 달라고. 정치인들 때문에 조국이 분열됐으나 우리는 나라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찬다고. 곧 기적처럼 정부군과 반군 사이 전투가 멈추고 2년 뒤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4년마다 지구촌을 들썩이게 하는 월드컵 시즌이 돌아왔다. 수십억 인구를 하나로 이어주는 축구의 마법이 통하는 시간이다. 시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장석주 시인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을 보며 예측불가의 인생 드라마를 읽어낸다. “축구는 신을 잃어버린 20세기 인류가 창안해낸 새로운 종교”라고 말하는 시인의 글은 ‘남미의 월트 디즈니’라는 브라질 만화 거장 마우리시우 지 소자의 이미지와 서로 부합한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