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버려진 코피노] 한국인 아빠 28명 추적해보니 양육비 찔끔 보내다 끊기 일쑤… 비뚤어진 性관념 바로잡아야
첫 만남은 어학연수 중이던 2011년 9월 필리핀의 한 술집에서였다. 영어가 서툰 A 씨를 위해 천천히 말해주는 J 씨의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 5개월 후 J 씨의 배 속에서 자신의 아이가 자라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중절수술을 권했지만 J 씨는 “축복 같은 아이”라며 거부했다. 석 달 후인 2012년 5월 A 씨는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며 J 씨에게 “출산일 전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지키지 않을 약속이었다. A 씨는 반년 정도 J 씨에게 다달이 50만 원가량을 부치다가 지난해 2월 “전화도 걸지 말고 문자메시지도 보내지 말라”는 한마디를 끝으로 연락을 끊었다.
A 씨는 J 씨가 올 3월 위자료와 아이 양육비로 4500만 원을 청구하자 적잖이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A 씨는 “필리핀 아내를 맞을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듯 귀국했다”며 “내가 백 번 잘못한 일이지만 약혼자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해야 할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법무법인 대광에 양육비 청구 의사를 밝혔던 필리핀 여성 7명 중 3명은 남성 측의 회유와 협박 탓에 소송을 철회했다. 필리핀 여성 S 씨(28)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 살배기 아들을 두고 잠적했던 한국 남성 B 씨를 찾기 위해 3월경 법무법인 대광에 소송을 의뢰했다. 소식을 들은 B 씨는 몇 해 만에 S 씨에게 연락해 “필리핀인이 한국 법원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며 “소송을 취하하지 않으면 청부업자에게 3만 페소(약 70만 원)만 쥐여주면 널 당장 어떻게 해버릴 수 있다”고 협박했다. 동거할 당시 B 씨로부터 종종 구타당했던 S 씨는 B 씨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소송을 취하했다. 소송 취하 후 4, 5개월 동안 양육비 명목으로 10만∼20만 원을 송금하던 B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한국인 남성들은 왜 혈육과 인연을 끊었을까. 동아일보 취재팀은 법무법인 대광, 코피노가족재단, 청소년보호단체인 탁틴내일 등을 통해 양육비 청구소송 의사를 밝힌 필리핀 여성들의 한국인 남편 28명을 추적해 5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의 사연은 다양했지만 그 배경에는 상대방을 ‘즐기고 헤어지면 그만’인 대상으로 보는 비뚤어진 성의식이 숨어있었다.
아동성착취반대협회(ECPAT)에 따르면 2000년대 후반 1만 명으로 알려졌던 필리핀 내 코피노는 최근 3만 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1998년부터 올해 3월까지 16년간 한국으로 온 탈북자가 2만6483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만만치 않은 수다. 파월 장병과 베트남 여성 사이의 혼혈을 이르는 ‘라이따이한’ 1만여 명이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코피노의 증가세는 이보다 심각하다.
코피노 급증의 원인은 우선 양국 교류 확산을 들 수 있다. 골프 투어객과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2012년 필리핀을 방문한 한국인은 연간 100만 명을 돌파했다. 사업과 유학 등을 목적으로 체류 중인 한국인도 8만여 명이다. 본보 취재 결과 코피노의 아버지들은 주로 유학이나 사업을 위해 필리핀에 장기 체류한 남성들이었다. 여행사 직원 등 필리핀을 자주 드나드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여기에 필리핀의 어려운 경제여건과 함께 낙태를 죄악시하는 가톨릭 문화가 더해져 코피노가 점점 늘어났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유럽이나 중국 남성과 달리 한국 남성들은 피임을 꺼려 성관계가 임신으로 이어지는 비율도 높다”고 말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한국 남성들의 인식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조건희 becom@donga.com·홍정수 기자
:: 코피노 ::
코리안(Korean)과 필리핀 사람을 뜻하는 필리피노(Filipino)의 합성어로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를 둔 혼혈아를 말한다. 대부분의 코피노가 극심한 가난과 사회적 냉대 속에서 자라고 있어 필리핀에서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