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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함석헌을 문창극처럼 편집하면

입력 | 2014-06-24 03:00:00


송평인 논설위원

악마의 편집은 무서운 것이다. 존경받는 함석헌 선생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갖고 내가 한번 그를 친일 반(反)민족주의자로 만들어보겠다.

함석헌은 조선이 망한 이유가 하나님의 분노 때문이라고 했다. “허탈해진 민중은 반항조차도 못한다. 그러나 민중이 그렇게 되면 그것을 짜먹고 살던 지배계급도 망하고야 만다. 그것을 모른 데가 우리나라 양반의 미운 점이다. 이것을 뜻을 붙여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노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일제의 35년 식민지배도 받아야 할 교육이고 겪어야 할 시련이라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많은 민족이 해방이 돼도 우리는 빠졌고, 3·1운동을 일으켜 민족 역사에서 전에 못 보던 용기와 통일과 평화의 정신을 보였건만 그것으로도 안 됐다. 받아야 할 교육이 아직 있고, 겪어야 할 시련이 또 있다.”

함석헌은 심지어 식민지근대화론까지 폈다. “당초에 일본이 올 때 먼저 신작로를 내고, 철도를 깔고, 토지를 측량하고, 농사 개방을 하고. 광산을 캐내고, 어업을 장려하고, 공업을 일으키고, 은행을 세우고, 각 방면으로 자본주의화에 힘썼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양반들의 착취로 원시상태를 못 면했던 경제에 처음으로 근대적인 발전이 시작됐다.”

함석헌은 38선은 하나님이 그은 금이라고 했다. “모든 조건이 미리미리 준비돼 가지고 38선은 생겼다. 어떤 목적 때문에 마련된 듯으로만 보인다. 38선은 하나님이 이 민족을 시험하려 낸 시험문제다. 아마 마지막 문제일는지 모른다. 이번에 급제하면 사는 것이고 낙제하면 영원히 망하고 말 것이다. … 우리의 잘못은 자유와 통일을 모른 데 있다. 그러므로 해방을 시켜 역사의 연합운동에 참여는 시키되, 그저 주지 않고 나라 복판에 금을 긋고 이것을 넘어보라고 한 것이다.”

어느 사람이 한 말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지 않고 특정 말만 떼어내 놓고 보면 이렇게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에 대해 저질러진 것도 이런 악마의 편집이다.

문 후보자는 우리 민족이 게으르다고 말했으나 그렇게 게을렀던 민족이 북간도나 연해주에 가서는 누구보다 부지런했다고도 언급했다. 진의는 게으름이 우리 민족의 본성이라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봉건적 착취 체제의 구조적 결과라는 정반대의 얘기를 한 것이다. 문 후보자는 일본이 이웃인 것을 지정학적 축복이라고 말했으나 그 맥락은 일본과 이웃한 것이 과거에는 지정학적 질곡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가까운 일본으로부터 선진기술을 수입할 수 있어 지정학적 축복이 됐음을 말한 것이다.

문 후보자는 일제의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개신교인이 흔히 하는 말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처음 마주한 조선 왕조는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이집트나 다름없었으나, 하나님은 이 민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곧바로 인도하지 않고 일제의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이라는 시련을 줘 단련시켰다는 시각이다. 개신교인 중에는 ‘통일된 자유의 나라’가 이뤄질 때까지 광야생활이 계속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좋은 일에서만 하나님의 뜻을 보지 않고 나쁜 것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보려한 것이 개신교인들이 힘든 현실을 딛고 일어선 원동력이 됐다. 사실 개신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그런 요소가 있다. 그것이 친일과 반민족주의로 매도된다면 개신교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말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선다. 우리 사회가 혼탁한 것은 말이 혼탁해졌기 때문이다. 악마의 편집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악마의 편집이 먹혀들어가는 현실이다. 말의 위기가 사회의 위기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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