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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과 ‘동경이야기’하며 ‘로마의 휴일’ 어떠세요

입력 | 2014-06-24 03:00:00

영상자료원서 ‘5개국 영화제―1950년대 영화’ 여는 신이화씨




‘5개국 영화제―1950년대 영화’를 만든 주역들이 개막을 앞두고 한자리에 모였다. 맨 앞 여성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신이화 씨. 뒷줄 왼쪽부터 고지마 히로유키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소장, 다니엘 카펠리앙 프랑스문화원 영상교류 담당관, 안젤로 조에 이탈리아문화원 원장, 다니엘 올리비에 프랑스문화원 원장, 볼챈 라이 주한미국대사관 아메리칸 스페이스 디렉터.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머릿속이 하얘졌다. 영화제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어느 문화원의 통보. '실수라도 한 걸까…. 역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길 위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불현듯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4월 말 어느 날이었다.

"아이디어는 참 좋은데…. 그걸 혼자 할 수 있겠어요?"
"혼자가 아니죠. 모두 뜻을 모으면 충분히 할 수 있죠."
무모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영화 전문가도, 영화를 전공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조직도, 배경도 없었다. 하지만 신이화 씨는 영화의 힘을 믿었다. 아버지를 통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깨달은 일이었다.

●"희망과 아픔의 역사 모두 남겨야"

재일교포 2세인 아버지 고(故) 신기수 선생(1931~2002)은 조선통신사 연구로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100여 점이 훨씬 넘는 자료를 수집했고 20여 권의 저서와 5편의 기록영화를 남겼다. 사람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친구가 많았다. 일본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오시마 나기사(1932~2013)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감각의 제국'(1976)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오시마 감독은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의 군국주의와 광기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인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 영화계에서 '낙인'이 찍힌 그는 1963년 TV로 눈을 돌려 다큐멘터리 '잊혀진 황군'을 제작했다. 징용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뒤 일본에 남아 비참한 생활을 하는 한국인을 다뤘다. 아버지는 이 작품을 통해 영상의 위력을 절감했다. 1964년에 사비로 오사카의 한 장소를 빌려 '잊혀진 황군'을 상영했다.

신기수 선생의 둘째 딸 이화 씨는 그런 분위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희망의 역사도 아픔의 역사도 모두 자료로 남겨야 한다."
아버지는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조선통신사 자료를 수집하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1979년에 제작한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는 그 과정의 산물이었다. 일본 문부성 지정 영화가 된 이 작품은 조선통신사가 일본 교과서에 실리는 계기가 됐다. 6년 동안 일본에 생존하고 있는 재일교포 1세들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해방의 그날까지-재일조선인의 발자취'(1986)도 기록에 대한 집념의 결과물이었다. 딸은 지난해 광복절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 영화를 국내 처음으로 상영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영국 런던대를 나온 신이화 씨는 BBC와 NHK에서 일하며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작업을 여러 차례 했다. 그녀는 전쟁 선동에 이용돼 온 영상이 바로 그 전쟁을 계기로 급속히 발달해 온 것에 관심을 가졌다. 영상이 자유로운 표현수단으로서의 제 역할을 되찾은 시대의 영화를 통해,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신 씨는 지난해 아버지의 유작 상영 뒤 다른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불면의 밤에 문득 생각 난 것이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 영화'였다. 탈레반 정권에서 쫓겨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물과 밥을 얻은 뒤에 원했던 것은 어두운 뉴스가 아니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드라마였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1월 말 어느 날이었다.

●인연이 낳은 인연… '사고'를 치다


아버지가 남긴 것들을 알리기 위해 4년 전 한국에 온 신 씨는 이듬해 프랑스문화원의 다니엘 올리비에 원장과 영화담당 교류관 다니엘 카펠리앙 씨를 알게 됐다. 스치고 끝날 수도 있는 만남이었지만 그들은 영화를 매개로 '동료'가 됐다. 아버지의 유작을 상영할 때도 두 프랑스인은 많은 도움을 줬다.

인연은 인연을 낳았다. 카펠리앙 씨는 그녀에게 일본 국제교류기금을 소개했다. 국제교류기금 덕분에 신 씨는 한국영상자료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따로 활동하는 여러 나라 문화원을 연결하면 '화학작용'같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패전국이든 승전국이든 2차 대전과 얽혀 있는 국가라면 관심을 보여주지 않을까.'

이미 인연을 맺은 프랑스와 일본부터 설득했다. 이어 아메리칸센터와 이탈리아문화원의 문도 두드렸다.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은 한국영상자료원도 흔쾌히 영화 출품과 상영 장소를 허락했다. '전후'(Post War)라는 공동 주제를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4월 11일 처음으로 각국 관계자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누군가 이런 얘기를 했다.

"보통 1년 전에 예산을 정하는데 이런 행사라면 2~3개 취소하더라도 하고 싶다."
틀은 잡았지만 힘든 날은 그때부터였다. 하루 동안 '이탈리아 들렀다 미국에 간 뒤 일본을 거쳐 프랑스에 도착하는' 일도 있었다. 리플릿과 포스터의 내용을 채우는 것도, 후원할 기업을 찾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일어와 영어에 능통한 신 씨는 국제공동기획 프로그램을 많이 했던 경험을 살려 무모해 보였던 퍼즐을 하나씩 맞춰 나갔다. 신 씨는 "힘들었던 일은 다 잊었다. 다섯 나라 동료들과 일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일한 공동주최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참가한 모든 나라가 한국 국민들에 자국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고지마 히로유키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소장)
"각 나라의 문화는 다르면서도 공통점이 있다. 영화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우리들을) 함께 일하게 해 준 그녀가 고맙다."(볼챈 라이 주한미국대사관 아메리칸스페이스디렉터)
"우리는 그저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는 남자들일뿐이다(웃음). 그녀가 대단한 아이디어를 알려줬다. 이 프로젝트를 지원할 수 있어 행복하다."(카펠리앙)
"서울에서 이런 행사를 처음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라도, 말도 다르지만 한 팀이 돼 교류했다. 유럽, 아시아, 미주, 나아가 세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안젤로 조에 주한 이탈리아문화원 원장)
"프랑스는 영화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많은 영화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지만 여러 나라와 공동 작업을 한 적은 없었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에게 가치 있는 일이다. 신이화 씨에게 감사한다. 내년에는 8~9개국이 참가하는 1960년대 영화제를 하고 싶다. 이제 시작이다."(올리비에 원장)

●"영화가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다"

6월 24일부터 7월 3일까지(30일 휴관, 전 공연 무료)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5개국 영화제-1950년대 영화'가 열린다. 한국-일본, 한국-독일 식으로 2개국 영화제가 열린 적은 많아도 5개 나라 문화기관이 같은 주제로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다.

제2차 대전 직후인 1950년대는 영화의 부흥기였다. 국경을 넘나들며 영화의 교류가 활발했다. 영화를 표현하는 수식어 중 가장 매력적인 어휘로 통하는 '펠리니적'이라는 말은 이 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했던 페데리코 펠리니(1920~1993) 감독에 대한 헌사다.

이번 영화제에는 올 3월 세상을 떠난 '누벨바그 거장'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1959)' 등 프랑스 영화 3편, 펠리니 감독의 '길'(1954) 등 이탈리아 영화 3편, '사랑은 비를 타고'(1952)와 '로마의 휴일'(1953) 등 미국 영화 2편, '동경 이야기'(1953) 등 일본 영화 3편, '자유부인'(1956)과 '지옥화'(1958) 등 한국 영화 2편이 상영된다. 영화 팬이라면 설명이 필요 없는 명작들이다. 하지만 전쟁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랑영화가 많다. 이런 주제가 '전후(戰後)'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5개국 영화제―1950년대 영화’ 포스터


'동경이야기'를 만든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사회에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영화에 사람이 잘 그려지면 세상일은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신 씨는 영화 소개 리플릿에 '프로젝트 기획자'로서 이런 글을 남겼다. '1950년대 영화는 밝음을 지향했으되 우리 옆의 상흔도 지우려 하지 않았다. 과거와 미래, 불안과 희망, 전쟁과 평화의 경계선을 서성이는 인간의 모습을 투영하려 애썼다. 아시아와 미국, 유럽이 한때 공감했던 소중한 가치를 다시 한번 공유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올리비에 원장은 이번 영화제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 이탈리아, 일본, 한국, 그리고 프랑스가 참여한 이 프로젝트를 '영화의 마법'이라 부르고 싶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잊었던 과거를 현재의 햇빛 속으로 끌어 들인다.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신 씨는 카펠리앙 씨의 안내로 3년 전 서울에서 열린 한일영화축제를 간 적이 있다. 그녀는 그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을 만났다. '피와 뼈'(2004) 등으로 일본 영화계를 놀라게 했던 최 감독은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오시마 감독이 최 감독의 스승이어서다. 이번 영화제가 성공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신 씨는 '해방의 그날까지' 상영을 앞두고 불안해하던 자신에게 최 감독이 해 준 말을 되돌려줬다.
"걱정할 것 없다. 일단 영화를 볼 수 있는 자리만 만들어라. 그러면 영화가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다."
내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기도 하다.

*공연 관람은 무료지만 예매를 하면 편리하다. 한국영상자료원(www.koreafilm.or.kr) 홈페이지에서 '상영일정보기'로 들어가 살구색 바탕에 소개된 영화를 클릭하면 예매할 수 있다. 외국영화에는 모두 한글 자막이 들어 있다.

이승건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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