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남규', '문남규 삭주'
지명 14일 만에 사퇴한 문창극 국무 총리 후보자가 20대 사망한 조부인 문남규 선생에 대해 언급했다.
문창극 후보자는 이날 "저의 가족은 문남규 할아버지가 3·1운동 때 항일운동을 하셨다고 문기석 아버님으로부터 듣고 자랐다"라며 "친일파 공격이 사리에 맞지 않아 검증 과정에서 저의 가족 이야기를 했고, 검증팀이 보훈처에 자료를 가지고 알아봤다"라고 했다.
그는 "저의 원적은 평북 삭주다. 그리고 이 사실이 실려 있는 1927년 상해 발행 독립신문 찾아보시라. 이거 언론재단에 다 있다. 저희 가족은 밖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문남규 선생을 보훈처 사이트 '독립유공자(공훈록)' 인물찾기 란에서 검색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문남규-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소속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군에게 희생되었다. 대한독립단은 3.1운동을 계기로 보다 효과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주로 의병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1919년 4월 각 단체를 해산하고 결성하였으며, 복벽주의(復?主義)를 이념으로 하였다. 본부를 류하현 삼원포에 두었으며, 도총재 박장호(朴長浩), 부총재(副總裁) 백삼규(白三圭)였으며, 도총재부 산하에는 사무기구로 총단이 있었는데 총단장에 조맹선(趙孟善), 부단장에 최영호(崔永浩), 김원섭(金元燮)이 활동하였다. 국내외에 모두 100여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였으며, 만주지역에는 거류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는 관구(管區)를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였다. 환인(桓仁),장백(長白),무송(撫松),임강(臨江),관전(寬甸),집안(輯安) 등 10개 현에 지단을 세웠다. 이후 1923년까지 국내와 만주지역에서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거쳐 의군부(義軍府)로 발전하였다. 문남규는 1921년 평북(平北) 삭주(朔州)에서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일본군과 전투 중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문남규', '문남규 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