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소비자경제부 차장
어린 시절 과자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통로와 같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릴 때쯤 ‘언젠가는 먹고 말 거야’라는 광고문구와 함께 등장한 ‘치토스’는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태평양 건너 바비큐 소스의 풍미를 처음 알렸다.
옛날 과자 얘기를 꺼낸 이유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과자들이 여전히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인기 과자 가운데 새우깡은 1971년 탄생했고 죠리퐁, 꿀꽈배기는 1972년생이다. 초코파이와 에이스는 1974년에 탄생했다. 1980년대에도 계란과자, 포테토칩, 홈런볼, 버터링, 꼬깔콘 등이 태어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과자 회사들은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새 제품을 연구해 내놓기보다 성공이 검증된 제품에 의존하려는 습성이 강하다. 외생변수로 시장이 급성장한 경제 성장기엔 외국의 인기 제품을 먼저 모방해 국내에 소개하면 성공이 보장됐지만 시장이 성숙해 버린 지금은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스테디셀러 과자 탄생이 드물어진 까닭이다. 성장 정체를 딛고 살아남는 법은 가격 인상이 있을 뿐이다. 한 유명 과자회사의 회장은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신제품 개발도 안 하고 마케팅도 안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실제로 국내 대표적인 식품기업들의 연구개발(R&D) 투자는 매출액의 1%를 밑도는 수준이다.
보수화되는 것은 비단 과자회사만의 얘기가 아니다. 자동차, 가전, 반도체, 조선…. 우리나라가 의존하는 주요 먹거리 산업은 대부분 1970, 1980년대에 시작돼 조금씩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다. 기업들이 새로운 분야의 투자를 기피하는 바람에 성장이 정체되는 모습이 확연하다. 어떤 전문가들은 “더이상 따라잡을 기업이 없어진 삼성전자에 필요한 것은 ‘제2의 애플’이 등장하는 일”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렇게 검증된 성공 공식만 따르다가는 필연적으로 갈 길을 잃게 된다. 입사 시험을 보러 전국에서 10만 명이 모여든다는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의 공채가 한 차례 진행될 때마다 취업전선에서 9만 명씩의 방황하는 영혼이 생기는 셈이다. 브랜드 컨설턴트 권민 씨는 자신의 책에서 “사람은 모두 원본(原本)으로 태어나지만, 대부분 누군가의 복사본(複寫本)으로 죽게 된다”고 말했다. “유일한 존재로서 유일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누군가를 따라 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희석한 나머지 잉여 되거나 여분의 사람으로 전락해” 발전의 동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눈길을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로 돌려야 할 때다. 그리고 다시 경제성장을 얘기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과거의 성공모델을 답습하려 하지 않고 모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새로운 ‘원본’을 발견해 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