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영 교수 ‘18세기 중국책 수입금지’에 색다른 배경 주장
조선 사대부들이 엎드린 자세로 작고 가벼운 중국 책을 올려놓고 읽을 때 사용했던 상인 ‘연엽문서견대(蓮葉文書見臺·맨 위쪽 사진)’. 중앙에 새긴 ‘臥着是宣’이란 글귀는 ‘누워 보기 알맞다’는 뜻이다. 가벼운 중국 책은 조선왕조실록 보관함(가운데)처럼 나무로 만든 견고한 함에 넣어 보관한 반면에 무겁고 두꺼운 조선 책은 종이와 베로 만든 지갑(아래 사진)에 넣어 보관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들은 조선시대 청 황제를 만나러 연경(현재의 베이징)에 간 조선사신단이 구입한 중국 책을 일컫는 이름이었다. 사신단이 중국에서 구입한 서책은 중국의 최신 문예사조와 정보의 통로였다.
이 중국 서책의 수입을 금지했던 임금이 있었다. 바로 정조(1752∼1800·사진)다. 정조는 1799년(즉위 23년) 연경에 가는 사신단에 중국 서책을 구입하지 말라고 엄명한다. 즉위 초인 1776년 규장각을 재건할 때만 해도 전용 보관공간을 만들 만큼 중국 서책 수용에 적극적이던 정조를 무엇이 이렇게 바꿔놨을까?
실제로 정조는 개인문집 ‘홍제전서(弘齊全書)’에서 “당본(중국 책)은 권질이 가볍고 얇아서 펼쳐 보기가 쉽고 눕거나 기대어서 멋대로 뽑아 보는 데도 불편함이 없다. 그러므로 방종을 좋아하고 구속을 싫어하는 자들이 우리나라 경서를 놔두고 중국 서책을 취한다”고 당대 현실을 비판했다. 정조는 ‘패관소설이 문제지 경전 수입까지 금지하면 안 된다’는 신하들의 진언에도 “(중국 책 중에는) 심지어 수진본(오늘날의 문고판)까지 있고, 누워서 (책을) 보는 상까지 있을 지경이다”며 “이는 경서를 업신여기는 행동”이라며 수입금지 명령의 배경을 분명히 밝혔다
조 교수는 “정조는 서책 형태는 물론 글자체에서도 유행보다는 바른 것을 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며 “필요한 중국 서책은 충분히 수입했다고 생각한 정조가 사대부들이 중국 책을 들여와 느끼는 지적 허영이나 자기만족을 경계한 영향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와 박제가(1750∼1805)도 각각 이런 조선과 중국 책의 무게 차이를 비교한 글을 남겼다. 중국 책은 ‘책지(冊紙)’나 ‘서엽(書葉)’이라 불렀던 인쇄지부터가 조선 책보다 얇고 가벼웠다. 닥나무 장피섬유를 재료로 만든 조선 한지와 달리 중국 종이는 가벼운 마와 대나무 단피섬유로 책을 만들었다. 게다가 조선 책은 글이나 그림이 찍히지 않은 상하 여백이 중국 책보다 넓었다. 또 종이 한 장으로 책표지(冊衣)를 만드는 중국 책과 달리, 조선 책은 안쪽 표지에 종이를 추가로 덧대고(후배접) 물에 쉽게 젖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밀납 성분으로 코팅하는 과정이 추가돼 책의 무게와 두께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 책의 이런 차이는 가구 문화에도 차이를 가져왔다. 중국에선 얇고 가벼운 대신 파손이 쉬웠던 책을 넣는 나무로 만든 함(函)과 갑(匣)이 발달해 많이 쓰였다. 반면 조선에서는 종이와 베를 재료로 만든 육면체 함인 지갑(紙匣)에 책을 넣어 책의 오염과 훼손을 막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