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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방구석에나 처박혀 있지”에서 “남자보다 낫네” 소리 듣기까지

입력 | 2014-06-26 03:00:00

[여성 1호를 만나다]<14·끝>첫 내부승진 박경순 국민건강보험공단 징수상임이사




박경순 국민건강보험공단 징수상임이사는 여성이라도 현장을 중히 여기면 성공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더 많은 분야에서 여성 1호와 2호, 3호가 쏟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국민건강보험공단 박경순 징수상임이사(58)와 마주 앉았다. 말단 직원으로 출발해 35년 만인 지난해 7월, 이사로 승진한 인물. 그동안 공단에서 외부 여성 인사가 이사로 영입된 적은 있지만 평사원으로 이사직에 오른 것은 박 씨가 처음이다. 공단에는 총 5명의 이사가 있다. 징수이사는 보험료를 징수하고, 자격을 관리하는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자그마한 체구에 소박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동료들은 그를 ‘여걸’이라 부른다. 어떤 질문에도 시원시원하게 답변하는 스타일. 기자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 뭔가요? 형식적인 답변 말고, 진짜로 본인이 생각하는 비결.”

곧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역시 막힘이 없는 스타일 같았다.

“우연찮게 들었어요. (윗선으로부터) 제가 일을 성의 있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대요.”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싱거운 답변. 하긴, 최선을 다하는 거야말로 이 시대 모든 직장인의 승진 비결이 아니겠는가. 기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박 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충 설명을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단 한 번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자라는 시선과 싸웠어요. 뒤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런 모습이 성의 있게 보였나 봐요.”

현장의 가치를 깨닫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5년. 고교를 갓 졸업한 박 이사는 9급 공무원 시험을 통과했다. 첫 근무지는 경북 구미의 한 면사무소.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손에 든 임용장이 조금은 자랑스러웠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법한 덩치의 면장이 그를 맞았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쩌렁쩌렁한 목소리. 면장은 허공에 대고 대뜸 화부터 냈다.

“남자를 달라고 했는데 왜 또 여자야?”

잘못한 일도 없는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면장은 그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군청으로 전화를 걸고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또 여자를 보내주면 어떡합니까? 현장에 할 일이 산더미인데, 당장 남자로 바꿔주든지, 데려가든지 하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면장은 한참을 씩씩거렸다. 여자 공무원은 호적등본 발급과 같은 업무만 해야 한다는 게 면장의 생각이었다. 이미 호적계에 여직원이 있었으니 더이상의 여직원은 불필요하다는 거였다. 반대로 현장엔 새마을운동이니, 모내기 독려니, 벼 파종 독려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농부, 인부들과 어울려야 할 남자 공무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였다.

여자는 ‘현장’에 있으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 40여 년 전,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걸 스스럼없이 말했다. “여자가 뭘…. 그냥 방구석에나 틀어박혀 있지.”

박 이사는 도로를 넓히는 ‘취로사업’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현장 업무다. 면장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람이 모자라니 어쩔 수 없었다.

첫날, 현장에 가자마자 인부 인원부터 체크했다. 점심과 퇴근 무렵 다시 인원을 체크했다. 지출된 비용에 대해서도 영수증 하나까지 모두 챙겼다. 원칙을 지켰을 뿐인데, 인부를 동원하는 나이 든 마을 이장은 투덜거렸다.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팍팍하게 굴어? 도무지 융통성이 없어. 지금껏 다른 직원들은 나한테 맡기고 볼일 보던데….”

사소한 것에도 ‘이권’과 ‘떡고물’이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노회한 이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잘 알았다. 하지만 원칙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전략을 수정했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현장에서 살아남겠다고.

그 후로, 회의가 열릴 때마다 박 이사는 마당까지 뛰어나가 이장들을 맞았다. 사업에 필요한 장비들은 이장이 얘기하기 전에 미리 제공했다. 복잡한 서류 작업은 물론이고 눈코 뜰 새 없는 농번기에는 이장이나 마을 사람들의 농협이나 우체국 업무도 대신 해 줬다.

진심은 통하는 법. 철모르는 젊은 여자가 날뛴다던 이장들이 마음을 열었다. 여직원은 호적등본이나 떼주어야 한다던 면장도 생각을 바꿨다. 이구동성. “웬만한 남자보다 낫구먼.”

박 씨는 3년 3개월간 공무원 생활에서 현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 후 그는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까지도 제 철학의 첫 번째 항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게 바로 현장입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부딪쳐야 합니다. 현장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지사 순례는 지금도 계속

박 이사는 1979년부터 2009년까지 줄곧 대구, 경남과 부산 일대의 지사에서 근무했다. 그 사이에 차장, 부장, 지사장으로 차례차례 승진했다. 거의 매번 ‘여성 행정직 최초 승진’이란 기록을 남겼다.

2009년 3월 서울 본사의 고객지원실장으로 발령받았다.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당시 공단의 공공기관 고객만족도는 ‘미흡’ 수준이었다. 이를 ‘우수’로 끌어올려야 했다.

“뭐가 문제인지부터 알아야 고칠 거 아닙니까? 고객과 직접 접촉하는 현장의 창구부터 확인했어요. 역시 문제가 있었어요. 답은 늘 그렇듯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창구에서는 이른바 ‘민원 병목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류 발급이나 보험 확인, 보험카드 발급 등 여러 업무가 뒤엉켜 있어 하나만 늦어지면 나머지까지 모두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비스 현장이 이러니 고객들이 피부로 느끼는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박 이사는 이 점부터 고치도록 했다.

고객의 의견에 즉각 피드백을 보내는 ‘VOC(Voice Of Customer)’ 시스템도 개발했고, 홈페이지도 개편했다. 그 덕분에 공단의 고객만족도는 이듬해 ‘보통’, 2011년 ‘양호’ 수준으로 향상됐다.(현재는 ‘우수’ 점수를 받고 있다.)

2011년 7월 대구지역본부장으로 발령받았다. 다시 야전사령관으로 돌아가는 길. 지사장은 자신의 지사만 챙기면 되지만 본부장은 지사 모두를 다독여 성과를 내게 해야 한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막상 취임하자 마음은 편해졌다. 그랬다. 이미 해법은 나와 있었다. 바로 지사를 ‘순례’하는 것. 한 달 이내에 총 31개의 지사와 출장소를 방문해 현장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취임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이 계획은 24일 만에 달성했다.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사실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정작 현장에선 높으신 분의 ‘행차’로만 여길 수도 있는 노릇.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지사를 방문할 때면 항상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경청했다. 처음에는 입을 여는 직원이 별로 없었다. 박 이사는 가능하면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줬다. 그러자 지사 직원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성주에는 참외, 고령에는 수박이 많이 납니다. 제가 현장을 돌면서 알게 된 지식이죠. 시찰로는 현장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지사에 갈 때마다 애로사항과 사옥 상태, 운영 현황 등을 물었고, 그걸 책자로 만들어 첫 본부장 회의 때 제출했습니다. 반응이 아주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현장 챙기기는 그가 대구지역본부장으로 있던 1년 6개월간 지속됐다. 이 기간 그는 지사별로 평균 3회 이상 방문했다. 이사가 된 지금도 지사 순례는 계속하고 있다.

여성 차별, 모두가 나서야 깨져

임원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직장생활 초년병 시절의 설움은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

“처음 공단에 취직했을 때 민원창구에서 일을 했어요. 당시 여자라면 당연한 코스였어요. 남자 직원들은 중요 부서에 배치됐지만 여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여성 직원에게는 늘 ‘보조’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가 오랜 시간 지방을 돌며 지사에서 근무한 것도 차별 때문이다. 여러 차례 본사 근무를 희망했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본사에 여자가 근무할 자리가 없다”였다.

인사철이 되면 속이 터졌다. 제아무리 성과를 내도 평가 점수는 늘 꼴찌였다. 가장 좋은 점수는 나이 많고 남자인 직원들이 받아갔다. 물론 승진도 남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나이 든 남자 선배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데, 여자가 양보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강했어요. 공정하지 않다고 항의하면 이상한 여자 취급 당했죠. 억울하더라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요. 그 때문에 남자 동료들보다 승진이 한참이나 늦어졌어요.”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공단에도 여성 부장과 실장이 흔해졌다. 그래도 작은 바람이 있단다. 7월에 공단에서 인사가 나는데, 이번에는 업무부서가 아닌 핵심부서에서 여성 실장을 배출하기를 간곡히 청한다나.

동아일보의 ‘여성 1호를 만나다’ 시리즈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더불어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루기 위한 방법도 물었다.

“아직 봄이 오지는 않았어요. 멀리 산을 보면 꼭대기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어요. 그 눈을 치우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각 분야에서 여성 1호가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여성 1호가 나왔다면 2호, 3호가 계속 쏟아져야죠.”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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