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기 경제부 기자
최근 만난 한 공기업 간부는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하고 연신 불만을 쏟아냈다. 정부가 18일 발표한 공공기관 경영평가 때문이었다. 그가 일하는 공기업은 낙제점인 D등급을 받았다. 불과 1년 전 기관평가 우수등급을 받아 임직원들이 두둑한 성과급을 챙겼는데 올해에는 낮은 성적 때문에 성과급이 대폭 삭감되는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낮은 평가로 불이익을 받은 개인의 불평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번 경영평가를 둘러싸고 곳곳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 경영평가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30년 전인 1984년. 당시 10여 개 정부 투자기관에 대한 평가로 시작한 경영평가제도는 공기업들의 ‘철밥통’ 관행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 2000년대 중반부터 대폭 강화됐다. 2005년부터 90여 개 정부 산하기관이 평가 대상에 포함된 데 이어 2009년부터는 낙제 등급을 받은 공공기관장을 퇴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까지 마련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민간기업과 달리 경영성과가 아무리 나빠도 국민 세금으로 ‘웰빙’을 누리는 공공기관에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취지였다.
문제는 상당수의 공공기관이 정부의 ‘보이는 손’이 내리는 평가에 공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비계량 평가가 총점의 45%를 차지하는 평가방식이 주로 도마 위에 오른다. 특히 부채 비율, 인건비 인상률 등 수치로 나타나는 경영지표가 비슷한 유형의 다른 공공기관과 큰 차이가 나기 어려운 구조인 만큼 리더십 등을 평가하는 비계량 평가가 사실상 최종 평가등급을 좌우하는 상황이다.
정부의 공공기관 정책이 바뀔 때마다 평가기준이 180도 달라지는 일도 많았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해외 자원개발사업 확대 정책으로 높은 등급을 받았던 에너지 공기업들은 올해 경영평가에서 해외투자로 인한 부채 증가로 대거 낙제점을 받았다. 지난해에 높은 평가의 원동력이 됐던 사업들이 올해 평가에서는 감점의 원인이 된 셈이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공공기관 정상화의 고삐를 조이는 ‘희생양’으로 에너지 공기업들을 지목해 아예 사전에 C 등급 이하를 주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렇다 보니 공공기관들 사이에서는 “복지부동 하라는 얘기냐”는 말도 나온다. 신뢰를 잃은 평가는 공공기관 개혁의 도구가 아닌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제대로 된 공공기관 정상화를 위해서는 공공기관 경영평가제도가 먼저 정상화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