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9일 흐림. 그녀, 트랜스포머. #114 Samantha ‘?’(2013년)
내게도 ‘그녀’가 있었다. GH1이란 코드명으로만 알려진 그녀는 이제야 밝히건대 대한민국 부산에 사는 대학생이었다. 세기말을 무사히 넘긴 인류에게 PC통신은 축복이었고 우리는 나우누리라 불리는 첨단 정보 교신 체제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접속은 일주일에 한두 차례뿐. 음악을 좋아하는 인류가 모이는 ‘채팅방’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우린 처음 만났다. 라디오헤드의 어떤 노래가 숨은 명곡인지에 대한 토론이며 스티비 레이 본의 연주가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에 관한 공감으로 우린 끈끈해졌다. 밴드 연습이 끝나면 초조한 심정으로 PC방에서 나우누리에 접속해 GH1을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가 접속하지 않을 때 십자가처럼 고통스레 날 끌어당기던 그때의 초침. 6개월 정도 교신했지만 우린 현실의 공간에서 결국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만난 적도 이별한 적도 없는 그녀….
난 사만다의 자동 작곡 기능이 가장 탐났다. 해변의 평화로운 정경이나 둘만의 시간을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인화해 내는 건 사만다가 직관적으로 만들어내는 기타나 피아노의 분산화음이다. 캐나다 록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 멤버들이 ‘그녀’ 속 연주곡 대부분을 만들었다. 그들이 지난해 낸 앨범 ‘리플렉터’ 마지막 곡인 ‘슈퍼시메트리’는 원래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다. 따지고 보면 수많은 고객의 손 편지를 대신 써주는 테오도르는 인간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운영체제 아닌가. 초대칭성이나 초끈이론이 뭔지는 몰라도 인간 테오도르와 운영체제 사만다는 슬픈 대칭을 이룬다.
영화 ‘그녀’가 상상 속 이상형을 형이상의 세계에 가뒀다면, ‘트랜스포머’는 그런 가상을 거대 로봇이라는 집채만 한 물성으로 현현시켰다. 사무라이 정신과 마초 성향으로 칠갑된 이 로봇의 의리는 매력적이다. 어쨌든 멍청한 자동차 내비게이션과는 사랑에 빠질 수 없단 말이다!
난 왜 내가 지은 노래를 단 한 곡도 GH1에게 들려주지 않았던가. 만약 그리했더라면, 그 분산화음들은 나와 그녀의 현재를 바꿔 놨을까. 내 아내는 다른 사람이었을까. 응답하라, GH1. 아니다. 응답하지 마라, 그녀.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