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기호 소설가
따지고 보면 그 모든 오해는 다 한 권의 책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평일 오후 2호선 지하철 안이었다. 한양대역을 지났을 때였던가, 깜빡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맞은편 의자에 앉은 한 사람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즈음은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을 보기 드문데,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 반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지하철을 타고 있었던 거야. 나는 정신이 조금 몽롱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맞은편 사람이 들고 있는 책 표지 쪽으로 시선이 갔다. 빨간색 양장에 작가의 흑백 사진이 반 넘게 차지하고 있는 책 표지. 나는 그 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예전 나와 한때 사귀었던 애인이 좋아한 ‘카프카와의 대화’라는 책이었다. 너는 카프카, 나는 야누흐, 애인과 나는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거였다. 내가 알고 있는 책을 진지한 표정으로 읽고 있는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그 풍경이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스마트폰 카메라로 몇 장, 연속으로, 찍은 것뿐이었다. 그 사람의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한데, 문제는 그 사람 바로 옆에 다른 젊은 여자가, 하얀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다리를 꼰 채 자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팔 대 이 가르마를 탄 경찰은 내 스마트폰 앨범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건 뭐 한 장도 아니고, 네 장을 연사로 찍으셨네?
나는 침착하고 단정한 어투로, 그게 아니다, 나는 그 여자가 아니고, 그 옆에 사람을 찍으려 한 거다, 더 정확하게는 책을 찍으려 했던 것이다, 내가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남의 속옷에 관심을 두겠느냐,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다른 경찰이 불쑥 참견해왔다.
“어, 이거 빨간 책이네. 혹시 빨간색, 이런 거 보면 막 흥분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나는 그 경찰을 보며 역시 침착하고 단정한 어투로 ‘그거 카프카입니다. 카프카 친구가 쓴 카프카’라고 대답했다.
나는 말을 말자, 생각했다.
“한데요, 여기 스마트폰 앨범에 잠긴 파일이 하나 있네요. 이것도 우리가 한번 봐야겠는데?”
내 스마트폰을 계속 뒤적거리던 팔 대 이 가르마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다시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나는 의자를 좀 더 앞으로 당기며 말했다.
“아니, 그건 저기…, 제 사생활인데….”
등 뒤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나는 잠긴 파일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저기, 그거 안 보시면 안 될까요?”
“허허, 이분 정말 의심스럽네? 선생님이 이거 안 풀어줘도 저희가 다 풀어 볼 수 있어요.”
나는 팔 대 이로부터 스마트폰을 넘겨받은 후에도 계속 잠긴 파일을 풀지 않다가, 또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비밀번호를 눌러 그 파일을 열고 말았다.
“아니, 이게 뭐야?”
잠긴 파일의 첫 번째 사진을 본 팔 대 이가 옆에 앉은 경찰을 보면서 말했다.
그가 내민 내 스마트폰 안에는 화장을 하고 귀걸이를 단 내 모습이, 수줍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이 화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