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논설위원
원로 언론인인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줄 세력은 이제 없어졌다. 특정 지역, 특정 그룹 정도는 남아 있겠지만 의미 있는 오피니언 세력으로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우파 야당’으로 돌아섰다”고 단언했다. ‘웰빙족 새누리당’은 청산의 대상이라고도 했다. 내 지인 중에도 “저런 정권과 정당을 위해 왜 투표를 해야 하느냐”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박 대통령이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자 야권 실세인 박지원 의원은 ‘극우 꼴통’ 운운하며 반드시 낙마시키겠다고 호언했다. 박 의원은 부패, 권력 남용, 거짓말 등의 구악(舊惡) 종합세트를 갖췄다는 평을 듣는다. 이런 정치인이 말도 안 되는 ‘극우 낙인’을 찍으며 달려든 것은 코미디에 가깝다. 하지만 아무리 자격 미달자라도 야당의 총리 인사 비판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 전 주필이 총리감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총리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와 국회 표결은 법에 명시한 사항이다. 잘못된 선동에 벌벌 떨며 법적 절차를 짓밟고 ‘문창극 내몰기’에 앞장선 새누리당 의원들, 특히 김무성 서청원 의원은 두고두고 대가를 치를 것이다. 총리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지도 않아 국민이 청문회 공방을 지켜볼 기회조차 박탈한 박 대통령의 책임도 크다.
확고한 가치관도, 진실에 대한 존중도, 거짓에 대한 항전 의지도 없이 금배지의 단물에만 익숙한 새누리당의 웰빙 기회주의 체질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2008년 광우병 선동 때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지금 새누리당 의원 가운데 정치권의 허위와 위선에 과감히 ‘아니요’라고 맞선 정치인은 김진태(강원 춘천) 이노근 의원(서울 노원갑) 등 몇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문창극 낙인찍기’와 관련해 언론의 책임이 컸다는 비판도 거세다. 이런 사안에서 실체적 진실보다 정파성이 앞서는 좌파 언론의 ‘극우 친일 공세’는 으레 그러려니 하더라도, 다른 언론들도 잘못된 ‘KBS 프레임’을 추종해 여론을 호도했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문 후보자의 ‘언론계 친정’인 중앙일보와 일부 인터넷 매체를 논외로 치면 KBS 보도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초기부터 제대로 지적한 언론사는 드물었다.
가치와 대의(大義)의 깃발 아래 싸울 수 있는 구성원이 적은 조직은 결정적 위기가 오면 오합지졸의 집단으로 전락한다.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이명박 박근혜 후보가 승리한 데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훼손을 막기 위해 투쟁한 온라인 우파와 아스팔트 우파의 공이 적지 않았다. 우리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지키려고 춥고 배고픈 길을 밟은 ‘대한민국 세력’이 느끼는 분노의 심각성을 박근혜-새누리당 정권이 깨닫지 못하고 계속 비겁한 기회주의에 안주한다면 그 후폭풍은 갈수록 커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