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 단순해서 아름다운 축구
브라질 월드컵의 스타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묘기는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메시나 호날두, 네이마르 등의 경기를 보면 남성의 격렬한 몸놀림이 어찌 그리 우아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운동 경기 가운데 유독 축구를 '아름다운 경기'로 불러 주는 가장 큰 이유는 단순함에 있다. 공 한 개만 있으면 누구든, 어디서든 다른 어떤 경기보다 간단한 규칙으로 축구를 즐길 수 있다. 그러한 단순함이 세계인들을 축구에 미치도록 하는 최고의 매력이라고 한다.
○ 칠레 대통령의 ‘축구정치’
허나 남미 칠레의 축구팬들은 달랐다. 2010년 칠레에서 33명의 광원들이 지하 700m 갱 속에 갇혀 있다 69일 만에 구출되었을 때 세바스찬 피네라 대통령의 지지율은 63%까지 치솟았다. 구출 작업을 진두지휘한 그는 국제 정치에서 남미의 샛별로 꼽혔다. 그는 살아 돌아온 광원들과 축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6%의 성장률에 낮은 실업률 등 경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1년도 못가 25% 수준으로 급락했다. 국민들이 등을 돌린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의 '정치축구'였다.
당시 칠레는 12년 동안이나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하던 터였다. 축구 때문에 국민의 자부심과 사기는 바닥이었다. 그러나 2006년 헤롤드 메이네-니꼴스가 축구연맹 총재가 되면서 반전했다. 그는 이웃 아르헨티나의 명장 마르첼로 비엘사를 국가대표 감독으로 모셔왔다. 메이네-니꼴스는 갖가지 추문으로 얼룩진 연맹을, 비엘사는 의욕과 프로 정신을 잃어버린 국가대표팀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칠레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까지 갔다. 비엘사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비엘사는 메이네-니꼴스가 연맹 총재 선거에서 재선되지 않을 경우 칠레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오래 동안 잃어버렸던 축구를 되찾아준 두 사람의 퇴장은 국민들에게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메이네-니꼴스를 연맹에서 몰아내기 위한 구단주들의 배후에, 최고 인기 구단 콜로 콜로의 대주주인 피네라 대통령이 있다고 보았다. 국민의 60% 가까이가 피네라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이 구단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선출을 조종했다고 응답했다. 피네라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대통령" 신세가 된 것은 불공정한 축구정치를 한 탓이 컸다.
한국의 축구팬들은 칠레인보다 더 했으면 더하지 덜 하지 않다. 그들도 아름다운 경기뿐 아니라 공정하고 깨끗한 축구판을 원한다. 축구판이 바로서야 아름다운 경기가 펼쳐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의 참패는 축구 기술과 축구 정신력이 모자랐기 때문만이 아니다.
원칙과 공정함을 저버린 정치 행위가 대표 팀을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부 축구팬들이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의 처참한 몰락을 예견한 것은 학교나 클럽 팀을 맡아본 적이 없는 홍명보 감독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고 본다. 축구협회는 외국 명장을 영입한다고 명단을 언론에 흘리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아무도 접촉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홍 감독을 내세우기 위한 일종의 작전 아니었을까.
지금 일부 축구팬들은 시작부터 공정성과 원칙이 무너진 '정치축구'를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맥·학맥 축구'니 '황제 훈련'이란 말까지 정치판에서도 쉬 찾기 어려운 단어들이 1년 동안 한국 축구를 두고 나돌았다.
홍 감독은 "시합에 뛰지 않으면 대표 발탁은 없다"는 원칙을 공언했으나 영국 2부 리그에서도 후보인 박주영을 뽑았다. 더욱이 정식 선발도 하기 전에 한국에서 협회가 지원하는 단독 훈련을 하게했다. '황제 훈련'이라는 희대의 용어는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팬들의 질타는 1년 내내 계속 됐으나 축구협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책임한 부풀리기 보도로 애국심에 불타는 국민들을 오도한 언론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스코틀랜드 대표선수이며 리버풀의 전성기를 이끈 명감독이었던 빌 샹클리는 "축구는 삶과 죽음이 걸린 문제보다 훨씬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축구에서마저 원칙과 공정성이 무너진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면에서 샹클리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경기에선 졌으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원칙과 공정성을 줄기차게 외친 축구 팬들이 건재했다는 사실이 월드컵에서 본 한 줄기 희망이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