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도 못갈뻔한 시골소녀, 어머니 집념으로 꿈이 열렸다
모교 군산 대야초등학교 가천이길여도서관 앞에 선 이길여 회장. 지난달 사재 20여억 원을 들여 문을 열었다. 이길여의 꿈은 바로 이곳 대야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됐다. 군산=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길여를 키운 건 팔 할이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 차순녀 여사(데레사·1909∼1998)는 딸만 둘 낳았다. 손이 귀한 전주 이씨 집안에서 차 여사와 딸들(이귀례·85·한국차문화협회이사장과 이길여 회장)은 천덕꾸러기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미운 오리새끼였다.
둘째 이길여는 더 심한 구박덩어리였다. 온 집안이 잔뜩 아들을 기대했다가 한순간 초상집분위기로 변했다. 어머니는 출산 후 곧바로 밭일을 나가야 했다. 할머니는 “무슨 벼슬을 했다고 미역국이냐”며 미역가닥을 마당으로 내던져버렸다. 이길여는 그렇게 태어났다. 누구 하나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길여의 고향 마을은 전북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현 군산시). 비산비야(非山非野)다. 앞에는 대야평야(大野平野)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뒤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병풍처럼 에두르고 있다. 어린시절 이길여는 등잔불 아래에서 공부했다. 동네에서 전깃불이 들어오는 곳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방앗간뿐이었다. 이길여는 으레 저녁을 먹으면 책 보따리를 들고 그곳으로 달려가 책 속에 빠졌다. 그러다가 그만 그곳에서 쭈그린 채 잠이 들기도 했다.
이길여는 전혀 공부 잘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으스대거나 새침데기처럼 굴지 않았다. 보통 땐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공부는 주로 혼자 있을 때 했다. 여고시절엔 한 시간거리의 기차통학을 했다. 기차는 하루 두 번 다녔지만, 기차시간은 제멋대로였다. 학교가 끝난 뒤 밤 12시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이길여는 그런 짬나는 시간에 남들이 모르는 구석에 처박혀 책을 팠다.
“교실 교단 밑엔 다락방 같은 빈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숨어 몰래 공부하곤 했다. 학교 뒷산의 반송 아래도 공부하기 안성맞춤이었다. 기차가 끊기는 날, 한밤중 걸어서 집에 닿으면 새벽 2시가 넘었다. 잠깐 눈 붙이고 다시 학교에 가야했다. 그래도 힘든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당장 ‘누가 학교에 다니라고 했느냐’며 욕바가지가 쏟아질 게 뻔했다. 난 그 시절부터 거의 하루 4시간을 넘게 자 본 적이 없다. 잠자는 자(者)는 꿈을 꿀 순 있겠지만, 잠을 이기는 자는 꿈을 이룰 수 있다. 6·25전쟁 중엔 방공호에서 촛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이길여는 평생 독신이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이길여의 꿈은 의사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집 없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데려다가 돌봐주곤 했다. 아픈 것들은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줬다. 그러다보니 이길여 집은 동물병원처럼 짐승들로 복닥거렸다.
그렇게 키운 가천대 길병원은 개인이 세운 병원 중 국내 최대규모로 성장했다. 국내 대형병원은 대개 종교(세브란스, 가톨릭)나 재벌(삼성병원, 서울아산병원), 대학법인(서울대, 고려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참으로 행복했다. 환자들은 내게 애인이고 가족이었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불렀고, 잠을 안 자도 정신이 맑았다. 내 나이 스물예닐곱. 여기저기서 맞선을 보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있으면 환자 한 분이라도 더 돌보고 싶었다. 서른 넘어 뉴욕 유학시절, 재미교포사업가와 한동안 데이트를 즐겼다. 그와 함께 뉴욕센트럴파크에서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고, 새벽이슬 맞을 때까지 춤도 췄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가 청혼을 했지만 난 거절했다. 난 한 남자의 아내로 머무를 수 없었다. 나에겐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아내와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이길여는 최근 그의 모교 대야초등학교에 사재 20여억 원을 털어 ‘가천이길여도서관’을 지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연면적 998m². 그는 이미 대야초등학교 탁구부 전용 실내체육관을 지어줬고, 선수단 전용버스도 마련해줬다. 해마다 훈련비도 꼬박꼬박 대준다. 그래서 그는 ‘탁구할머니’로 불린다. 지난달 도서관 개관식은 한마디로 동네 잔칫날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고, 한쪽에선 왁자하게 노래자랑이 펼쳐졌다.
이길여의 호 ‘嘉泉(가천)’은 ‘아름다운 샘’이란 뜻이다. 류승국 박사(1923∼2011)가 지어줬다. ‘嘉(가)’는 ‘길(吉)이 스무 번(十十)이나 더(加)해진다’는 의미. ‘새참광주리에 밥은 없고 놋수저만 가득했다’는 그의 어머니 태몽과 비슷하다.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반지 따위엔 전혀 관심 없다. 그 돈이면 첨단의료장비 하나 더 들여놓는다. 휴지 한 장, 이면지 한 장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첨단장비 욕심, 사람 욕심은 아무도 못 말린다. 돈을 물 쓰듯 한다. 하나도 아깝지 않다. 그렇게 뇌과학연구소, 암 당뇨연구원에 수천억 원을 쏟아부었다.
“내 모토는 박애 봉사 애국이다. 나누고 베풀면 행복하다. 그건 나를 위한 것이다. 6·25전쟁 때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학우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난 그들 몫까지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있다. 그게 애국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만 생각한다. 난 돈에 대해선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이 살아왔다. 그저 내 몸을 던져 환자를 치료했을 뿐이다. 난 많은 돈이 필요 없다. 자식이나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병원은 이길여의 것이 아니라 환자들의 것이다. 유서를 통해 모든 것을 재단에 귀속시킬 것이다. 내 꿈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직 한참 멀었다.”
▼ “학비-취직 걱정마라” 네쌍둥이와의 약속 ▼
“약속 지킬수 있게 잘자라줘서 고맙고 대견하구나”
2010년 21년 만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 네쌍둥이 간호사. 왼쪽부터 황슬, 황설, 황솔, 황밀. 가운데는 이길여 회장. 이길여 회장 제공
황 씨 부부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네쌍둥이가 나온다는 데,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지 막막했다. 그들에겐 이미 첫째 딸이 있었다. 그래도 황 씨는 “다 제 밥그릇은 차고 나온다”며 내심 개의치 않았다. 부인 이봉심 씨도 “그래도 난 기독교인인데 그럴 수는 없다”며 한 명만 낳으라는 탄광병원의 권유를 거절했다.
“꿈에 산에 올랐는데, 사방 가득 붉은 진달래가 너무도 고왔다. 나도 모르게 ‘어마나 꽃 좀 봐!’ 했더니 어디에선가 ‘그렇게 좋으면 다 가져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정신없이 내 품에 그 꽃들을 안았다. 그러다가 그만 꿈이 깼는데 그게 태몽이었다. 얼마 후 배가 자꾸만 불러왔다. 출산 한 달을 앞두고 친정인 인천 주안으로 왔다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부랴부랴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병원을 갔는데 거긴 또 인큐베이터가 없었다. 결국 우왕좌왕하다가 아침 6∼7시쯤 찾아간 게 길병원이었다.”
이른 아침 이길여 원장은 다급한 보고를 받았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방금 네쌍둥이 산모가 들어왔습니다. 진통이 시작됐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무슨 소리야, 당장 제왕절개수술부터 해야지.’ 이 원장은 수술집도를 산부인과장에게 맡기고, 모든 의료진을 비상대기 하도록 했다. 한동안 병원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사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네쌍둥이가 모두 건강하게 태어날 확률은 높지 않았다. 산모가 예정일보다 3주나 앞서 진통이 온데다 양수까지 터졌다.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네쌍둥이가 태어난 일은 딱 한 번밖에 없었다.
천만다행 네쌍둥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산모는 출혈이 계속돼 나팔관 제거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 중 셋째 ‘솔(1.7kg)’이만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문제는 병원비였다. 황 씨 부부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인큐베이터비용에 수술비용까지 엄청날 텐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때 이길여 원장이 말했다. “병원비는 됐습니다. 퇴원이나 잘하세요. 훗날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드릴 테니, 네 아이 잘 키우세요.” 그러면서 평생진료카드까지 만들어줬다.
그 후 황 씨 부부는 아이들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들은 삼척을 떠나 용인에 새 둥지를 틀었다. 가난했지만 화목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네쌍둥이는 중고시절 반장을 도맡아했다. 모두가 태권도 공인 4단일 정도로 활달했다. 모두 3년제 간호학과(수원여대 2명, 강릉영동대 2명)에 수시 합격했다.
3년 후 그 약속도 어김없이 지켜졌다. 아이들은 2010년 2월 졸업과 동시에 길병원에 취직했고, 2011년에는 가천대에 편입해 4년제 간호사과정까지 마쳤다. 2013년엔 모두 좋은 짝을 만나 나란히 결혼했다.
이길여 원장은 2007년 네쌍둥이를 다시 보고 친손녀처럼 반가웠다. 그 부모님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렇게 아이들을 훌륭하고 예쁘게 키웠을까.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잘 자라준 아이들이 참 고맙고 대견했다. 검은 띠에 아이들 이름을 새긴 태권도복을 생일선물로 주었다. 아이들은 이제 모두 우리 길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환자들은 헛갈리기 일쑤다. 나도 처음엔 그놈들을 잘 구별할 수 없었다. 어찌나 똑 닮았는지. 맏이 ‘슬’이가, 막내 ‘밀’ 같고, 셋째 ‘솔’이가, 둘째 ‘설’ 같고. 하지만 이젠 척보면 누구인지 금세 안다.”
● 이길여 약력
♣학력 ▽전북 옥구 대야면 출생(현 군산) ▽군산 대야초교(1946·21회)∼이리여고(1951)∼서울대 의대 졸업(1957) ▽미국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 인턴수료(1964∼1965) ▽미국 퀸스종합병원 레지던트수료(1965∼1968) ▽일본대 의학부 의학박사(1975∼1977) ♣경력 ▽산부인과 개원(1958) ▽의료법인 길의료재단 설립(1978) ▽한국여자의사회 회장(1982∼1984) ▽재단법인 가천문화재단 설립(1991) ▽사회복지법인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설립(1992) ▽사단법인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 설립(2010) ▽학교법인 가천학원이사장(가천의대-신명여고-가천인력개발원 1994) ▽서울대의대동창회장(1995∼2005) ▽가천박물관설립(1995) ▽가천의대설립(1998) ▽학교법인 경원학원이사장(1998∼2000) ▽가천대총장(2000∼2012) ▽중앙인사위원회 인사정책자문회의의장(2003∼2004)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사장(2007∼2008)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