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에서
이성부(1942∼2012)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을 다해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되는지를 나는 안다
화가 박대성 씨의 ‘석파정’
평소 산행을 즐겼던 시인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에서 배운 경험을 작품들로 남겼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성찰의 시간이 인생의 지혜로 녹아든 시 ‘산길에서’는 말한다. 누추하고 평범한 존재들이 길을 만들었다는 것을. 덧없고 하찮아 보이는 우리 삶도 뭔가 하나씩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아무리 인생의 무게가 버거워도 끝까지 주저앉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에선 104세 수녀가 등장해 ‘뿌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남긴다. 곁가지에 신경이 팔려 있느라 뿌리의 소중함을 잊고 지내는 사람이 주인공만은 아닐 것이다. 꽃과 열매만 보지 말고 뿌리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으로 생각하면 성공한 인생도 실패한 인생도 없다. 각자 자신만의 인생을 사는 것으로 충분히 값진 의미가 있으므로.
2014년의 절반을 돌아 7월을 여는 주말. 이런저런 슬픔과 복잡한 마음을 떨치고 오랜만에 산길을 걸어보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사는 게 고되고 지리멸렬하다고 괴로워하기보다 바람과 풀꽃과 만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움츠러든 마음을 활짝 펴보는 거다. 삶의 의미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일단 내게 주어진 생이니 있는 힘껏 움켜쥐는 것일 뿐. 태어날 때처럼.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