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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전 추억 팔고… 해외명품 팔고… 바꾸니 바뀌더라

입력 | 2014-07-08 03:00:00

[젊은 열정, 젊어진 전통시장]<4>부활 성공한 日本 전통시장 2곳
‘향수 세일즈’ 쇼와노마치… ‘재개발 승부수’ 마루가메마치




《 한국 전통시장은 일본에서 상점가로 통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갈수록 경쟁력을 잃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일본의 고도성장은 상점가에 치명타를 날렸다. ‘마이 카’ 붐이 일자 도심 주변에 대형 마트가 들어섰고 상점가 곳곳에 셔터를 내린 상가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위기 속에 기회도 숨어 있다. 상인들이 의기투합해 상점가에 활력을 불어넣는 보석 같은 사례도 나오고 있는 것. 상점가에 활기가 돌자 젊은이들도 상가 운영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부활에 성공한 대표적인 상점가 2곳을 찾았다. 》

오이타 현 분고타카다 시의 재래시장인 ‘쇼와노마치’ 입구에 세워진 1950년대식 버스. 수작업으로 복원한 이 버스는 지금도 주말이면 관광객을 태우고 시장통을 달린다. 분고타카다=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 옛 추억을 파는 ‘쇼와노마치’

5일 일본 규슈(九州) 북동부의 오이타(大分) 현 분고타카다(豊後高田) 시. 오이타 공항에서 차로 50분이나 떨어진 데다 공항리무진 버스는 하루 4대에 불과했다. 일본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철길조차 닿지 않는 외진 지역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이 도시를 찾은 관광객은 37만7000명에 이른다. 이들은 1인 평균 4300엔(약 4만3000원)을 쓰고 가 연간 직접적인 경제효과만 16억2000만 엔에 이른다. ‘쇼와노마치(昭和の町)’라는 상점가 덕이다.

쇼와노마치는 쇼와(히로히토·裕仁 일왕 시대의 연호·1926∼1989)의 마을이라는 의미다. 550m 길이의 시장 골목길을 따라 들어선 상점가를 일본이 고도성장하던 쇼와 30년대(1955∼1964년)의 모습으로 재현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꿈과 희망에 들떴던 당시를 되돌아보며 추억에 잠긴다.

쇼와노마치는 한때 규슈 지역을 대표하는 잘나가는 전통시장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빠져나가고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활력을 잃었다. 인적이 드물어 “개와 고양이밖에 다니지 않는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막다른 상황에서 1990년대 들어 지역 상공회의소와 상점가의 30, 40대 젊은층이 머리를 맞댔다. 앉아서 죽느니 뭐든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낡고 오래된 상점 건물들이 차별화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데 주목했다. 일본 고도성장기의 전통시장 모습을 재현해 ‘추억과 향수(鄕愁)’를 세일즈 포인트로 삼자는 것이다. 이른바 ‘역발상 마케팅’이다. 성공을 장담할 순 없었지만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4가지 실행전략을 짰다.

먼저 건축물 재생. 옛 건물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기에 알루미늄 출입문을 나무 소재로 바꾸고 아크릴 간판을 나무 간판으로 교체하면 됐다. 전통시장을 비켜간 재개발 붐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다음은 역사 재생. 상점마다 쇼와 시대의 보물을 하나씩 전시해 볼거리를 만들기로 했다. 예컨대 떡가게 앞에 옛날식 떡방아를 전시하는 식이다.

세 번째는 상품 재생. 막대 아이스크림 등 쇼와 30년대의 상품을 가게마다 하나씩 판매토록 했다. 마지막으로 쇼와 상인 재생. 고객의 눈을 보면서 “어디서 왔나요”라고 말을 건네는 등 시장 골목길 특유의 풋풋한 ‘사람 냄새’를 되살렸다.

볼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시장 초입의 빈 곡물 창고도 활용했다. 후쿠오카(福岡)의 한 수집가를 설득해 쇼와 시대의 장난감 등 추억이 될 물품을 6만 점 이상 전시했다. 쇼와 시대의 교실과 살림집을 되살렸고 관광객들의 발길을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해 레스토랑도 열었다. 시장이 살아나자 외지로 나갔던 젊은이도 일부 돌아왔다.

쇼와노마치 진흥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분고타카다 시 관광마을 주식회사’의 구와바라 시게히코(桑原茂彦) 상무는 “경험으로 볼 때 전통시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장 상인을 중심으로 상공회의소와 자치단체가 공동의 목표를 설정해 혼연일체가 되는 게 중요하다”며 “쇼와노마치를 계속 활성화하기 위해 주변 관광지와 연계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 백화점과 경쟁하는 ‘마루가메마치’

일본 가가와 현 다카마쓰 시 ‘마루가메마치’ 상점가의 개발 후 모습. 상가 운영 전문회사가 상가 주인들로부터 토지와 건물을 넘겨받아 일정 구역을 통째로 재개발했다. 마루가메마치상점가진흥조합 제공

지난달 29일 가가와(香川) 현 다카마쓰(高松) 시내. 미쓰코시(三越) 백화점 1층에는 명품 브랜드인 루이뷔통 매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맞은편 건물에는 유명 핸드백 브랜드 코치와 주얼리 브랜드 티파니가 보였다.

3개 브랜드가 인접한 공간에 있었지만 입점한 곳은 엄연히 다른 구역이다. 루이뷔통은 백화점 건물에 있지만 코치와 티파니는 ‘마루가메마치(丸龜町)’ 상점가 건물 1층에 들어서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전통시장 안에 명품 브랜드가 입점한 격이다.

다카마쓰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길이 470m의 마루가메마치는 낡은 이미지의 상점가와 거리가 멀었다. 상점가는 자그마한 개별 건물의 집합이 아니라 대형 쇼핑몰로 돼 있었다. 천장을 높여 개방감을 키웠고 5층부터는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섰다. 입점한 업종은 유리공예품, 카페, 유기농 음료 등 세련미가 풍겼다.

거리에는 어린아이 손을 잡고 나온 가족 단위 고객이 많았다. 주말 기준으로 약 2만8000명이 찾는다.

마루가메마치가 백화점과 견줄 만큼 세련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위기’가 가져다준 기회 덕분이다. 1990년대 들어 3만5000명에 이르던 주말 방문객 수는 1995년을 끝으로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경제가 불황에 빠져들면서 마루가메마치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지경에 놓였다.

상인들은 ‘변하지 않으면 쇠락뿐’이라는 절박함 끝에 마루가메마치상점가진흥조합을 결성했다. 유럽이나 도쿄(東京) 등지의 성공한 상점가 사례를 연구했다. 내린 결론은 개별 점포가 아니라 상점가 전체를 종합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것.

조합은 상가 운영을 전문으로 하는 자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상가 주인들에게 토지와 건물을 모두 자회사에 투자해 달라고 요청했다. 자회사는 상점가 전체를 재개발하고 추후 상인 유치, 상점가 관리 등을 하겠다고 설득했다.

자회사는 중앙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유치하고 상점가 건물 위에 오피스텔을 짓는 사업계획을 세웠다. 상가 주인들은 토지와 건물 기증과 함께 평균 7000만 원씩 투자하면 새 상가를 분양받을 수 있었다. 셈에 밝은 상인들이 봐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처음엔 완강히 반대하던 상인들이 조금씩 동의하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재개발을 마친 상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는 전체 상가 중 절반 정도가 재개발을 끝냈다. 수제화 구두를 파는 하마노(ハマノ)제화의 하마노 다이스케(濱野大輔) 사장은 “칙칙하던 상점가가 재개발로 산뜻하게 변하자 가족 단위의 젊은 고객이 크게 늘었다”며 “장사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후루카와 고조(古川康造) 마루가메마치상점가진흥조합 이사장은 “한국 전통시장도 마루가메마치와 같은 재개발 모델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상점가가 산뜻하게 바뀌니 상인뿐 아니라 파는 물건도 젊은 취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다카마쓰=박형준 lovesong@donga.com

분고타카다=배극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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