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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아리랑 공연 뒤에 숨겨진 평양의 아픔

입력 | 2014-07-08 03:00:00


주성하 기자

김정일이 ‘아리랑’을 왜 그리 좋아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의 생전 예술 관련 행적을 보면 전통음악에는 통 관심이 없었던 듯 보였다. 그가 즐긴 것은 ‘보천보전자악단’ 같은 여성 밴드나 100여 명의 남성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공훈합창단이었다. 사석에선 한국이나 일본, 옛 소련 가요들을 즐겨 불렀다.

1991년 북한이 영화 사상 최대의 역작인 ‘민족과 운명’ 시리즈를 창작할 때 김정일은 아리랑을 주제가로 선정했다. 이 영화 시리즈는 현재 60부 넘게 제작됐으며 앞으로 100부까지를 목표로 한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선 아리랑이 최고의 브랜드로 떠올랐다.

‘통일아리랑’ ‘강성부흥아리랑’ 등의 가요나 소설이 잇따라 창작됐고 TV, 담배 등에도 아리랑 상표가 대거 쓰이기 시작했다. 북한 최초의 조립 스마트폰 브랜드도 아리랑이다.

뭐니 뭐니 해도 ‘북한’과 ‘아리랑’이란 단어를 조합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남쪽에도 잘 알려진 연인원 10만 명이 동원되는 ‘아리랑 집단체조공연’이다. 2002년 처음 시작된 아리랑 공연은 수해 등으로 중단된 3년을 빼곤 지난해까지 매년 7월 말에 시작돼 두세 달간 진행됐다.

그러던 북한이 올해는 아리랑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북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관객도 없고 주민 여론도 매우 악화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긴 거의 똑같은 내용을 10년 넘게 반복하다 보니 보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관객의 절대다수는 평양 사람들인데 해마다 보고 또 보니 질려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강제로 관람 동원을 시키는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그렇게 해도 개·폐막 행사가 아니고선 관람석의 절반을 못 채웠다. 그렇다고 지방 사람들까지 대거 평양에 불러들이기엔 교통 사정이나 치안 통제력이 따라가지 못한다.

매년 공연과 관람에 억지로 동원되는 평양시민들은 ‘아리랑’이란 단어만 들어도 끔찍해한다.

실제로 화려한 아리랑 공연 뒤에 숨겨진 평양 사람들의 고통은 엄청났다. 가장 큰 부작용은 학생들이 훈련에 동원되는 반년 동안 공부를 못한다는 데 있었다. 가뜩이나 1고등중학교를 제외한 일반 중학교는 대학 가기도 힘든데 공연에까지 동원되다 보니 중학교 4학년부터는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아예 공부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는 부모들이 뇌물을 주고 자녀를 동원에서 빼내 따로 공부시키는 일이 보편화됐을 정도였다.

자녀가 공연에 동원된 부모들은 재정적 부담에 힘들어했다. 무더운 여름에 밤늦게까지 훈련을 하다 보니 자녀들에게 간식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돈을 따로 챙겨 보내야 하는데 평범한 가정들엔 힘에 부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남들 다 사 먹이는데 자기 자녀만 축에 끼지 못할까 봐 부모들은 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매일 학급에서 두 명씩 돌아가면서 전체 학급이 먹을 국을 만들어 와야 하고 선생들의 식사도 챙겨야 했는데 이 역시 부모들끼리 은근히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연 초기 몇 년 동안은 참가자들에게 TV를 선물로 주기도 했지만 부모들은 이미 그 이상의 돈을 썼다고 불만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남쪽의 대북 지원이 중단된 뒤부터는 선물 값어치도 해마다 점점 줄어들었다.

매일 10만 명 이상이 움직이다 보니 크고 작은 불상사도 잇따랐다. 삼복더위엔 훈련 도중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학생이 부지기수였고, 추위가 시작되는 10월 말엔 얇은 공연복 때문에 한 학생이 독감에 걸리면 다른 학생들까지 집단 감염됐다. 그래도 공연에 빠지면 안 되는 처지라 학생들 사이에서는 “맹장이 터져도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최근엔 늦은 밤에 귀가하는 학생들이 강도를 만나 봉변을 당하고 성범죄에 노출되는 일까지 발생하자 집이 먼 학생들의 경우엔 버스로 귀가시키는 배려(?)가 나올 정도였다. 몇 년 전엔 공연 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대동강 능라다리 난간이 무너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어쨌든 올해부터는 아리랑 공연이 없다고 하니 “보지도 않는 공연을 만드느라 왜 우리가 생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불만이 컸던 평양 사람들로서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아리랑 공연은 앞으로도 재개되기 어려워 보인다. 각종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해마다 공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행사파’들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보상이 없어진 것이 결정적 이유다. 북한은 초기엔 집단체조창작단을 비롯한 예술단체들과 간부들, 예술인들에게 훈장과 노동당 입당 등 정치적 보상과 각종 선물을 듬뿍 주었다. 하지만 10년 넘게 계속 줄 순 없는 일이다.

그나마 달러를 어느 정도 벌어다 주던 외국 관광객들도 요즘엔 많이 줄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공연을 본 해외 관광객은 1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대부분이 중국인이다. 그런데 악화되고 있는 북-중관계의 영향 탓인지 5월부터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했다. 한편 남북 교류가 활발했던 2005년 한 해에만 아리랑 공연을 관람한 한국인은 7730명이나 됐는데 2009년부터는 아예 사라졌다.

관객도 없고, 돈도 안 되는 아리랑 공연이 내년에 재개된다면 평양 사람들의 민심은 크게 악화될 것이다. 아리랑 공연은 아버지의 치적을 지워야만 환영받는 김정은의 아이러니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북한의 아리랑에 대한 집착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지난달 북한이 아리랑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민요 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2012년에 ‘한국의 서정 민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기 때문에 남북이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과 오랫동안 함께 숨 쉬며 해당 시대를 반영해 왔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북한에선 인민이 겪는 고통의 상징으로, 해외에선 분단의 상징으로 돼 버렸으니 아리랑은 지금도 구슬프다. 아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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