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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소련 개혁-개방 이끈 ‘냉전해체 설계자’

입력 | 2014-07-08 03:00:00

셰바르드나제 前외교 별세




1990년 6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교장관(앞줄 왼쪽)과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이 무역협정에 서명한 뒤 만년필을 주고받고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뒷줄 왼쪽) 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뒷줄 오른쪽)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미소짓고 있다. 사진 출처 Color Revolutions and Geopolitics 블로그

옛 소련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의 입안자 겸 동서 냉전체제 해소의 주역인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조지아 대통령이 7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6세.

그는 1928년 흑해 연안의 조지아 소도시 마마티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렬한 공산당원인 부친의 영향으로 20대 초 공산당에 입당해 승승장구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 시절이던 1985∼1990년 소련 외교장관을 지내며 미소 전략무기 감축협정 체결,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주도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를 막후에서 이끌어내 ‘개혁 전도사’ ‘냉전 해체의 설계자’라는 칭송을 얻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그는 1990년 9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최호중 당시 외무장관과 함께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1991년 고르바초프의 사임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셰바르드나제는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한 조국 조지아로 돌아갔다. 1992년 군부의 도움으로 당시 국가원수 지위인 국가평의회 의장이 됐고 1995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조지아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약 10년간 조지아를 이끌면서 셰바르드나제의 명성에는 상당한 금이 갔다. 만성적 경제난, 친인척의 부정부패,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통치 스타일, 지나친 친(親)서방 노선이 신생국 조지아를 가난과 혼란에 빠뜨렸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2000년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대통령 재직 도중 두 번이나 암살 위기를 맞았다.

2003년 11월 초 총선 부정 논란으로 수도 트빌리시 등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가 국회에 진입하자 셰바르드나제는 경호원들과 함께 탈출했지만 같은 해 11월 23일 하야를 선언했다. 그의 퇴진이 무력충돌 없이 이뤄진 데다 당시 시위대가 장미를 들고 시위를 벌여 이를 ‘장미혁명’이라고 부른다. 이는 소련 해체로 혼란에 빠졌던 주변국에도 영향을 미쳐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레몬혁명 등이 이어졌다.

말년의 셰바르드나제는 사저에서 은둔한 채 조용히 지냈다. 그의 타계가 알려지자 각국 지도자들이 애도를 표했다.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은 “셰바르드나제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러시아 정부 대변인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조지아 국민 및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의 말을 전했다”고 밝혔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