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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위 유령’ 페이지 터너… 검은색 옷 입고 장신구-향수 못써

입력 | 2014-07-08 03:00:00

피아니스트 동반자 ‘넘순이’ 세계




페이지 터너는 연주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호흡하는 파트너이자 1차 관객이지만 작은 실수로 연주의 흐름을 끊을 수도 있다. 사진 뒤에 악보를 넘기는 페이지 터너가 보인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오른쪽 사진)은 페이지 터너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악보를 넘길 수 있는 태블릿PC 전자악보를 사용하기도 한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서울시향 제공

2011년 12월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금호아시아나 솔로이스츠 공연 막바지에 피아니스트 손열음(28)이 무대에 올랐다. 마지막 곡 연주자로 나선 그의 손에는 악보가 아닌 태플릿 PC가 들려 있었다. 그는 20분 넘게 태블릿 PC에 담긴 베토벤 교향곡 ‘합창’ 4악장 악보를 스스로 넘기며 연주를 이어 나갔다. 국내 주요 연주회에서 연주자가 전자 악보를 사용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손열음 이후에도 연주회에서 전자 악보를 몇 차례 사용했다. 영국 시티오브런던 페스티벌 무대를 앞두고 독일 하노버에서 연습 중인 손열음은 3일 e메일을 통해 전자악보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페이지 터너(page turner)가 옆에 있으면 신경이 쓰여요. 제 맘 같이 넘겨주는 분을 만나기도 어렵고, 그런 분을 만난다 해도 리허설을 같이 여러 번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죠. 그래서 스스로 빠르게 넘길 수 있고, 혼자 넘기는 연습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전자악보를 써요.”

페이지 터너는 연주자 대신 악보를 대신 넘겨주는 사람. 남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공연계에서는 흔히 ‘넘순이’로 불린다. 주로 짧은 협연이나 음표가 많고 복잡해 연주자가 직접 악보를 넘기기 쉽지 않은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자주 등장한다. 독주회에서는 연주자들이 곡을 암기한 상태에서 무대에 서는 경우가 많다.

페이지 터너는 주로 피아노 전공 학생들이 일당 3만∼5만 원을 받고 아르바이트 삼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스스로 ‘무대 위의 유령’이라고 한다. 허영란 씨(30·연세대 음악대학원 반주과 졸)는 “입장, 퇴장할 때 연주자와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악보를 넘기는 행동 외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허용되지 않는다”며 “연주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가능한 한 무대에 없는 사람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에 주로 검은색 옷을 입고 장신구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페이지 터너에게는 불문율과 같은 공식이 있다. 항상 연주자의 왼편 뒤쪽에 앉아야 하고, 반드시 왼손으로 악보의 오른쪽 위 모서리를 잡고 조심스레 넘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주자의 왼손과 부딪힐 수 있다.

디토 페스티벌,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 리사이틀 등에서 페이지 터너로 일한 김청미 씨(27·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 졸)는 “가끔 입 냄새나 향수 냄새에 예민한 연주자들도 있다”며 “페이지 터너로 무대에 설 때는 향수도 뿌리지 않고, 화장품도 향이 없는 제품으로만 바른다”고 했다.

페이지 터너의 작은 실수가 연주를 망쳐버리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 경우도 있다. 10년간 페이지 터너로 무대에 섰던 피아니스트 K 씨(35)의 실수담.

“2007년 미국 휴스턴 라이스대에서 열린 현대음악 작곡가 지애나 부의 창작곡 발표회였어요. 작곡가가 종이를 아낀다고 낱장으로 6장의 악보를 만들었죠. 페이지를 넘기다 실수로 악보 전체를 건반 위에 떨어뜨렸어요. 연주자가 연주를 이어갔지만, 너무 놀랐죠. 객석의 관객들이 더 놀란 눈치였어요. 하하.”

피아니스트 임동혁(30)은 페이지 터너를 꺼리는 경우다. 그는 “리사이틀 때는 음악에 몰입하기 위해 악보도 보지 않는다”며 “연주할 때 누가 옆에 앉아 있으면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가급적 페이지 터너 없이 무대에 오른다”라고 했다.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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