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최영해의 오늘과 내일]불뚝 최경환 사무관과 경제대통령

입력 | 2014-07-10 03:00:00


최영해 논설위원

최경환 경제부총리 후보자가 경제기획원 초짜 사무관이던 1980년대 초반 부동산 대책을 만들 때 일이다. 컴퓨터가 흔치 않아 사무관이 직접 쓴 원고를 인쇄업자가 가져가 자료를 만들어 납품하던 시절이었다. 한 번 찍으면 20부는 기본이었다. 최 사무관은 밤늦게 도착한 인쇄물을 책상에 놓고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경제기획원이 발칵 뒤집혔다. 담당 국장이 장차관에게 보고하기도 전에 한 조간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린 것이다. 민감한 부동산 정책이 기자들에게 공식 브리핑을 하기도 전에 먼저 새나간 ‘사고’였다.

범인을 색출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최 사무관이 인쇄 자료를 세어보니 딱 한 부가 모자랐다. 수소문한 끝에 영자신문 출입기자가 전날 사무실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기자는 자매회사인 한 일간지 기자에게 자료를 넘겨줬다. 자료를 훔친 기자와 기사를 쓴 기자가 달랐던 것이다. 최 사무관은 의심이 드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통사정했다. “기자님, 이제 자료 주셔야죠. 기사도 나갔는데 더이상 필요 없잖아요. 지금 한 부가 모자라 보고도 못하고 있습니다.”

출입기자가 몇 안 되던 시절이었다. 말단 사무관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린 기자가 자료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무단 절도한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최 사무관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기자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어디 자료를 훔쳐갔어? 이 나쁜 ×!”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막내 사무관의 돌발 행동이었다.

이 일로 ‘무대뽀 최경환’ 소문이 관가에 퍼졌다. 당시 이 모습을 지켜본 한 경제 관료는 “자료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던 상황에서 최 사무관이 기자 멱살을 세게 잡는 바람에 성난 황소 이미지를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최경환은 김영삼(YS) 정부 시절 김인호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보좌관을 하다가 김 수석 퇴진과 함께 청와대에서 물러났다. 불명예 제대였다.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과 함께 YS에서 김대중(DJ) 정부로 영호남 정권이 교체된 것은 TK(대구·경북)인 그에겐 가혹한 시련이었다. DJ 정부 출범 1년이 지난 1999년 5월 예산청 기획관리실 법무담당관을 끝으로 19년 공직을 끝내야 했다. 공무원에서 언론인, 다시 정치인으로 그에겐 예기치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경환의 불뚝하는 성격은 4월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의 국회연설에서 재발했다. 주군(主君)인 박근혜 대통령을 비꼬는 안철수에게 연설 도중 느닷없이 “너나 잘해!”라고 고함을 쳐버렸다. 대통령을 비아냥거린 안철수에게 폭발하고 만 것이다. 초짜 사무관 때의 열혈 기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당 원내대표의 부적절한 처신이 도마에 올랐다.

그가 부총리가 되어 친정인 기획재정부로 컴백하는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경제 관료와 경제신문 논설위원, 국회의원, 지식경제부 장관, 여당 원내대표 등 남들은 하나도 하기 어려운 자리를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경험했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돌고 돌아 이제 최고 경제사령탑에 올랐다.

화려해 보이는 이력이 경제부총리직 수행에 약(藥)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전두환 정부 때 김재익 같은 경제대통령이 되려면 구중심처(九重深處)의 대통령 심기만 살피는 해바라기 부총리로는 턱도 없다. 권부(權府)와 여의도 정치에 휘둘리면 경제 컨트롤타워는 그림의 떡이 될 수도 있다. 금의환향의 기쁨은 잠시, 호랑이 등에 탄 최경환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불뚝 최경환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걱정이 기우(杞憂)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