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와 함께 하는 대한민국 헌법 이야기]
일상의 대화에서, 거리에서 벌어지는 각종 집회·시위 현장에서 우리는 자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영화 ‘변호인’에서도 주인공은 법정에서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변론하면서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이를 분명히 확인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헌법이 한낱 미사여구에 그치지 않고 국민 개개인에게 실제로 국가의 주인임을 의식하게 하는 표현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 우리 헌법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일까?
각 나라 헌법의 첫머리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반영한다. 이를테면 영국 왕의 폭정을 피해 신대륙에 정착한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은 절대 권력의 탄생을 막기 위해 헌법의 첫머리에서 권력 분립을 이야기했다. 유대인 학살로 상징되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은 자신들의 씻지 못할 과오를 반성하면서 인간 존엄 불가침의 원칙을 헌법 첫머리에 시작한다.
이 답에 대한 첫 번째 실마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국명인 대한민국은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 들어선 임시정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는 ‘대한’과 ‘민국’을 합친 말이다. 대한은 조선 말기에 사용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에서 따왔다. 민족적 동일성과 정통성이 계속됨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다. 민국은 군주가 통치하는 ‘제국(帝國)’의 시대가 끝나고 국민이 통치하는 시대가 됐음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공화국은 ‘세습 군주의 통치체제를 끝내고 임기를 가진 공직자가 한시적으로 국가권력을 담당하는 국가 형태’를 말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순간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은 “우리는 이제 제국의 신민이 아니고 공화국의 자유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의 주인은 제왕이 아니고 당당히 우리 국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는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갖고 있는 공화국의 의미가 분명히 담겨 있다. 헌법에 따르면 영국이나 일본처럼 권력은 없지만 상징적으로만 존재하는 형태의 군주제(여왕이나 천황)라도 우리나라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또 다른 의문이 든다. 대한민국이란 국명에 이미 공화국의 뜻이 담겨 있는데도 헌법 제1조는 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제헌헌법의 초안을 마련한 유진오 선생은 이렇게 설명했다.
“왕이 존재하는 군주제를 부정하는 공화국이라 해도 모든 권력이 하나로 통합된 독재국가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독재가 아닌 권력 분립을 기본으로 하는 민주국가라는 정치제도를 채택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국정이 국민 다수의 뜻과 대중의 선호를 따르는 방향으로 운영되기만 하면 민주공화국의 헌법적 역할을 다하는 것일까?
오늘날 민주주의는 국민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대표자를 선출하고, 이들이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의논해서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대의민주주의에서는 대표자에게 신임을 주어 국정을 맡기는 선거가 가장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선거 후에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끊임없이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의 조그마한 목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정치인은 진정한 국민의 뜻을 찾기 위해 늘 국민과 대화하고 무엇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의 정책 결정은, 당장은 국민 전부의 지지와 동의를 받지 못해도 장기적인 관점과 안목에서는 대다수 국민이 수긍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은 자신을 지지하고 뽑아준 유권자만의 대표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 모두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국민을 포용하고 진지하게 설득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정치는 결코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이게 바로 공화의 진정한 의미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는 의미는 단순히 세습군주를 부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며, 이를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실현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