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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최소화 만전을 기해 관리감독에 철저를 기한다고?

입력 | 2014-07-11 03:00:00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4>알 권리 막는 공공언어
공무원들만 이해하는 행정문서




‘난 정말 누 예삐오.’ ‘좋아좋아 누 예삐오.’

걸그룹 에프엑스(f(x))의 노래 ‘누 예삐오’ 가사다. 대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는 국적 불명의 제목과 가사로 한때 에프엑스는 우리말 파괴 주범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어떨까.

‘산업융합은 우리 경제가 Fast Follower에서 First Mover로 도약할 수 있는 핵심 경제의 전략으로 주력 산업의 성장 모멘텀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성장 DNA임을 강조함.’

한국어와 영어가 한데 모여 탄생한 이 문장의 출처는 정부 기관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해 5월 ‘산업융합 규제 및 애로 개선 추진단’을 발족하며 발표한 보도자료에 실린 문장이다.

행정기관의 공고문, 보도자료와 같은 공문서를 읽다 보면 한국어가 소통의 도구 역할을 잃어가는 모양새다. 이질적인 단어 사용은 물론이고 번역투 문장, 우리말과 외국어가 혼용된 문장,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는 비문, 상투적인 한자어 표현이 남발된 문장, 지나치게 긴 복문이나 생략문의 사용으로 쉽게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립국어원이 강원대 한국어문화원에 의뢰해 분석한 ‘2013년 행정기관 공공언어진단 보고서’를 살펴보자. 지난해 4∼10월 59개 행정기관이 발표한 1180개의 보도자료에서 우리말 어법에 어긋난 문장은 1754개, 우리말답게 표현하지 못한 문장은 813개, 어려운 용어 및 어조를 사용한 문장은 1302개에 달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피동표현이 과도하게 사용된 일본어 번역투 문장이 빈번히 등장한다. ‘피해 최소화 대책추진에 만전을 기하여’(피해를 최소화하도록) ‘검인을 득하지 않고’(검인을 받지 않고) ‘관리감독에 철저를 기하여 주시고’(철저히 관리·감독해 주시고) ‘별첨 서식에 의하여’(별첨 서식에 따라) ‘이번 선거에 있어서’(이번 선거에서) ‘대선에의 국민의 기대’(대선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같은 표현이 그 예다.

어색한 문장도 상당하다. 지난해 국가보훈처의 보도자료에 등장한 표현 가운데 “70세 이상 30만 명 이상 살아 계시나 국립묘지 안장 여력은 6만여 기 불과한 점을…” “공설묘지를 활용방안도 검토 중이다”와 같은 문장 및 표현은 정확한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행정문서에 자주 사용되는 만연체의 긴 문장과 한 문장 내 주어·술어 사용이 많은 중문 및 복문 또한 내용 전달을 어렵게 한다. 예를 들어 ‘대전국제우주대회는 60여 개국 3000여 명의 우주 관련 전문가 및 관련 업체가 참여하는 항공우주 분야 최고의 행사로 지속 가능한 평화와 발전을 위한 우주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대회는 학술대회·전시회와는 별도로 일반 시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우주 축제가 진행될 것이다’(2009년 대전시 보도자료)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시쳇말로 읽다가 숨넘어갈 정도로 호흡이 길다.

우리말과 외국어를 혼용한 문장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글문화연대가 지난해 10월 17개 정부 부처와 국회, 대법원이 4월부터 6월까지 발표한 보도자료 3068건에 대해 국어기본법 위반 여부를 조사한 결과 문장에 외국어를 그대로 드러내 사용한 경우는 7687건이었다.

공문서에 순화가 필요한 행정용어와 비문법적 문장이 남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인환 한글문화연대 연구위원은 “국민을 배려하지 않는 권위적인 공무원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어려운 행정용어 및 상투적인 비문은 공무원들끼리 소통하는 데 크게 문제되지 않는 ‘그들만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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