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 국제부 기자
8강을 넘본다던 한국, 우승을 노리던 개최국 겸 최다 우승국 브라질, 2010 월드컵 챔피언 스페인은 다 ‘의리 축구’로 망했다. 국가대표가 동창회도 아니건만 선수단 23명 중 15명을 자신과 청소년대표팀, 런던 올림픽을 같이 한 ‘홍명보의 아이들’로 채운 한국은 저조한 성적을 냈고 홍명보 감독이 끝내 사퇴했다. 브라질과 스페인도 능력 우선이 아니라 감독과 친분이 두텁고 이름값 높은 선수를 기용해 쓴맛을 봤다.
스콜라리 브라질 감독이 내세운 최전방 공격수 프레드와 8강전 승부차기에서 선방했던 골키퍼 세자르는 소속팀에서 별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과의 4강전에서 프레드는 슛 한 번 제대로 날리지 못했고 세자르는 무려 7점을 내줬다. 한국 누리꾼들은 둘을 ‘브라질의 박주영’ ‘브라질의 정성룡’이라 부른다. 유로 2008과 2012,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제패해 축구 역사를 새로 쓴 스페인도 마찬가지. 33세 노장 골키퍼 카시야스는 소속팀에서 두 시즌 연속 벤치 멤버였다. 델 보스케 스페인 감독은 경험이 중요하다며 그를 고집했고 예선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지연과 학연을 유달리 따지는 한국에서 의리는 종종 부정적으로 발현된다. ‘소속팀에서 최고 성적을 기록한 선수를 뽑겠다’는 자신의 말을 뒤집고 홍명보의 아이들로 ‘그들만의 월드컵’을 치른 한국 대표팀은 이제 ‘부정적 의리’의 대명사가 됐다. 홍 감독은 사퇴 기자회견에서도 해외파를 중용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며 ‘K리그 선수들은 유럽 가면 B급’이라는 발언을 해 ‘엔트으리(엔트리+의리)’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축구계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는 코드 인사, 진영 논리, 원칙 파괴의 근간에는 사적 의리와 내집단 선호가 자리한다.
단순히 결과가 나빠서 월드컵 대표팀과 홍 감독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스포츠라는 가장 공정해야 할 분야에서 편법과 불통으로 팀을 운영했다는 점, 자신이 아끼는 선수 15명에 대한 의리를 위해 축구 팬 및 국민과의 의리를 저버렸으면서 잘못조차 인정하지 않는 점이 문제다. 얼핏 촌스럽고 시대착오적 단어로 여겨지던 ‘의리’가 히트를 친 지 몇 달 만에 다시 부정적 의미로 쓰이게 됐다는 점도 아쉽다. 이거야말로 의리에 대한 의리가 아니다.
하정민 국제부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