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후보만 밀지 말고 저 노무현도 좀 도와주십시오”
○이인제의 공로
이인제 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아직 일본에 머물고 있던 1998년 가을이었다. 일본에 볼일을 보러 왔던 그는 내게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선배로서 충고하자면 김대중 대통령이 걸어온 길을 잘 연구해보시오. 김 대통령은 항상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하면서 지식을 넓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국민에게 그런 이미지를 부각시켰소. 그래서 성공한 것이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이인제 의원은 새천년민주당 총선 선대위원장, 나는 수석 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인제 선대위원장은 총선 직전 세종문화회관에서 ‘후원의 밤’ 행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인제 선대위원장이 뚜렷한 역사관과 빼어난 통찰력, 그리고 용기를 지닌 ‘제2의 DJ’이니 앞으로 나라를 위한 거목으로 키워 달라고 말했다.
이인제 위원장은 정말 열심히 지원유세를 다녔다. 그 결과 민주당은 16대 총선에서 ‘전국정당’이 되는 쾌거를 이뤘다. 전에는 당선되기 힘들었던 강원도와 제주도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비록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민주당 의석수는 총 115석으로 늘어났다.
당시 당원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김대중 대통령이 이인제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거나 반대한 것은 아니고, 그의 가능성을 본 내가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행보가 다른 대선주자들에게는 불만이었던 것 같고, 이후 내가 당내에서 인적쇄신의 대상자로 몰리게 된 배경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속으로 이인제나 노무현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대권후보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2001년 10월 새천년민주당 확대간부회의장에서의 노무현과 이인제. 아직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이다. 이인제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던 권노갑 고문은 “지금도 이인제만 보면 짠하고 안쓰럽다”고 했다. 동아일보DB
○노무현의 항의
16대 총선이 끝난 뒤 당내 최고위원 경선이 있었다. 그때 노무현 지도위원은 최고위원 자리보다는 입각을 원했다. 당시 그는 노동부 장관을 희망했으나 대통령은 그가 부산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했다.
“이인제 후보만 돕지 말고 저도 좀 도와주십시오.”
아직 대선후보 경선이 실시되기 이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왜 이인제 후보만 돕고 노 장관은 돕지 않겠는가? 당내 경선이 실시되면 도와줄 것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게. 현재 이인제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으니 그를 돕는 것이네. 하지만 열심히 해서 격차를 좁히면 두 사람 중 지지율이 올라가는 사람을 도와주겠네.”
그러자 노 장관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하신 말씀을 언론에 발표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나도 웃었다.
○광주 돌풍
그 후 노무현 후보가 광주 경선 때 돌풍을 일으켰다.
노무현 후보의 광주 돌풍에 대해 당 안팎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나 동교동계가 지원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를 지지하라, 말라 하는 얘기를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경선 도중 이인제 후보가 ‘음모론’을 거론하며 경선을 포기했다. 나는 끝까지 경선에 참여해줄 것을 직간접으로 요청했지만 그는 밑에 있는 참모들의 부추김에 크게 흔들렸다.
그는 내 말을 듣기보다는 오히려 청와대 음모설이니 뭐니 하면서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언론에 흘렸다. 내가 그건 아니라고 몇 번 이야기를 해줬는데도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후보가 얼마 후 여론조사에서 갑자기 지지도가 추락했다. 그렇게 되자 민주당 일부가 동요하기 시작했고, 탈당하겠다는 사람들도 나왔다. 그해 무렵 세간에서는 정몽준 의원의 인기가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있으면서도 나를 찾아오는 당원들에게 탈당하지 말라고 말렸다. 경선을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한 후보인데 당내에서 흔들면 안 된다고 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2002년 대선이 민주당의 승리가 아니라 ‘노무현의 승리’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노사모’가 지지했기 때문에 당선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사실은 수도권에 몰려 있는 호남사람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또 호남 지역에서도 97%가 그를 찍었다. 그 표는 민주당 후보에게 던진 것이지 노무현 후보 개인에게 던진 것이 아니다. 투표의 지역성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후보단일화 이전에 노무현 후보를 당내 일부에서 흔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일화 이후에는 다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조금 섭섭한 사람이 있었더라도 포용하고 가야 한다. 예전에는 당권이 바뀌더라도 주류가 60%를 차지하면 비주류도 40%는 차지했다. 정치란 통합을 지향하는 것이지 분열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 DJ가 박근혜 대통령 만들려 했었다? ▼
2000년 가을 ‘GP-Project’의 진실은
정치판, 특히 여권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는 온갖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노태우 대통령의 민자당 때도 그랬고,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 때도 그랬다. 대선주자의 영문 머리글자를 박아 ‘OO 플랜’이라고 이름 붙인, 그럴듯한 문건들도 나돈다.
‘GP-Project’도 그중 하나다.
“2000년 가을부터 2002년 초봄까지 DJ의 지시에 따라 김윤환 전 의원과 김태호 전 내무부 장관을 중심으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GP-Project)’가 가동됐고, 그 실무를 내가 맡았다. 해당 사실을 알고 있는 4인 중 세 분(DJ, 김윤환, 김태호)이 고인이 된 마당에 나의 말을 증언해 줄 사람이 남아있을 때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BBS 불교방송 총무국장을 지낸 이태호 씨가 2012년 3월 ‘1급 비밀, 그랜드 플랜’이라는 책을 내면서 했던 말이다. DJ가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 가난한 이를 위해 싸워왔는데도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이 힘들다. 내가 모든 것을 초월해 발상의 전환을 하겠다. 최대 정적(政敵)의 딸을 지도자로 길러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내 성의에 감격해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이 되지 않겠느냐”며 ‘GP-Project’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2000년 가을부터 2002년 초봄까지라면 허주(虛舟·김윤환의 아호)가 이회창에게 쫓겨나 민국당(민주국민당)을 차렸을 때다. 그리고 물밑에서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 민국당 간의 대선공조방안이 논의되던 때다.
아이디어 차원에서는 있을 수 있는 얘기다. 그런데 ‘리틀 DJ’라고 불리는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가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GP-Project’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회자됐다.
“허주는 울산 출신의 김태호 의원을 불러 DJ의 뜻을 전했고, (불교방송 사장을 지낸 적이 있는) 김태호 의원은 이태호 국장에게 실무를 맡겼는데 2001년 말 권노갑 고문에게 어려움이 생기고, 2002년 2월부터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면서 이 계획은 사실상 폐기됐습니다.” 한화갑은 월간 신동아 인터뷰(2013년 2월호)에서 이렇게 말한 뒤 “DJ의 진심을 증명하기 위해 경남 함양 사람인 이태호 씨가 그 책을 썼다”고 덧붙였다.
한화갑의 신동아 인터뷰 시점은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직후다.
신동아 기자도 그 점이 미심쩍어 “세 분은 작고했지만 권노갑 고문은 정정하신데, 왜 그 분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묻자, 한화갑은 “그건 모르지. 권 고문한테 물어봐요”라고 했다.
필자가 대신 물어봤다. 권 고문은 어이없어 했다. “김윤환 대표가 박근혜 후보 얘기를 자주 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본인 입으로 키워보자고 한 지도자는 평생 정대철 의원 한 사람뿐이다. 내가 이인제를 도울 때도 ‘너무 앞서지는 마라’고 했고, 한화갑의 대선 도전에 반대할 때도 ‘자네가 너무 안 된다고 나서지는 말게’라고만 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지시했다니, 화갑이 그 사람은 참∼.”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