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흥 논설위원
방한한 국빈이 한국의 대표 기업을 둘러보는 것은 의례적이지만 이 행사는 중국과 일본의 대립이 날로 격화하는 상황에서 특별한 감회를 갖게 했다. 영빈관 자리가 초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토의 23번째 기일(1932년 10월 26일)에 준공된 이 절의 건립 명분 중 하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두터운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절 맞은편 장충단이 명성황후 시해 때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고종이 세운 제단(지금은 공원이 됐지만)이니 일제가 묘한 위치에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시설을 세운 셈이다.
이토는 한반도 문제로 청나라의 이홍장과 두 번 교섭을 벌였다. 임오군란(1882년) 후 양국군의 충돌을 막기 위해 한반도 출병 때 서로 통보하기로 한 톈진 조약(1885년 4월 18일)과 청일전쟁을 끝낸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4월 17일)을 체결했다. 톈진 조약 때만 해도 청나라는 일본을 소국으로 여겼으나 청일전쟁에서 참패한 뒤엔 사정이 달라졌다. 먼저 화해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이홍장이 시모노세키에서 괴한에게 총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나마 청나라가 제기한 정전 조건을 일본이 수용했다.
중국은 그런 상황이 몹시 쓰라렸던 모양이다. 개혁적 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에도 이홍장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한 것은 실책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마오쩌둥도 조선과 대만이 일본에 강점되고 중국이 갈기갈기 찢긴 것을 한탄하는 소책자를 10대 때 읽고 “조국의 장래를 어둡게 생각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중국은 일본에 한반도를 빼앗긴 것이 가슴 아팠을 뿐 우리의 망국을 안타까워한 건 아니다. 시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20세기 일본 군국주의가 중한 양국에 야만적 침략을 해 양국 모두 큰 고난을 겪었다”고 비판한 것에 공감하면서도 씁쓸함이 남는 이유다.
지금 중일의 갈등은 포성이 안 울렸을 뿐 전쟁을 방불케 한다. 군사대국으로의 권토중래를 노리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대해 시 주석이 군국주의 부활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며 강경히 맞서고 있다. 두 정상이 맨 앞에 선 만큼 언제 우발적 충돌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을 세계사의 전변(轉變)이 전개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주변 정세를 저울질하며 어부지리를 얻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제대화는 파열음을 내고 10일 끝났다. 미국은 한중의 급속한 접근에 이미 경고 사인을 보냈다. 북한과 일본은 공공연히 거래에 나섰다. 한미일 3각 공조에 금이 가고 있지만 앞으로 한중관계가 이를 대체할 수 있을지 속단키 어렵다. 대통령의 눈치만 보며 한일관계를 마냥 방치하는 외교라인은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