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차동엽 신부]
아이의 머리를 쓰다 듬으며 미소를 짓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길을 걷다가 경호팀을 벗어나 일반인과 만나거나 강론 중 돌발 상황에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파격은 교황의 또다른 인간적 매력이다. 가톨릭출판사 제공
지난해 11월, 일본 가톨릭교회 나가사키 교구 특강 일정이 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대주교님과의 오찬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본 방문 계획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기대에 찬 말 속에서 일본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바티칸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는 뉘앙스가 짙게 풍겼다.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는 바티칸으로부터 어떤 언질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교황의 아시아권 첫 번째 방문 일정은 한국행으로 잡혔다. 여기에 첫 번째 사목 방문국이라는 영예와 한국 단독 방문이라는 특별함이 더해졌다. 내년으로 예정된 차기 방문국은 스리랑카와 필리핀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황의 한국 방문 일정은 그 자체로 추기경 서임식 때 염수정 추기경과의 만남에서 발해진 “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결정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정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낮은 곳을 즐겨 찾는 교황의 과거 여정을 되짚어볼 때 치유, 화해, 격려 이 셋 중 하나가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곳에 우선권을 두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우선, 치유의 요청이다. 오늘날 지구촌 현실을 전투 후 ‘야전병원’의 상황으로 보고 있는 교황에게 ‘치유’는 최우선 사안이다. 그러기에 교황은 전쟁, 재난 등의 참상 현장에 최우선의 관심을 기울인다. 다음으로, 화해의 요청이다. 교황은 과거 역사가 빚어낸 갈등과 증오를 청산하는 ‘화해’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을 우선적 소명으로 여긴다. 그리고 격려의 요청이다. 교황은 실의와 좌절에 처한 위기의 사람들에게 ‘격려’를 실어주는 것을 긴박한 요청으로 받아들인다. 적어도 이들 세 가지 요청 가운데 하나가 일정 수위에 달해 있는 한에서, 교황은 방문 초대에 응했다.
찬찬히 짚어보면, 교황의 한국 방문 의중에는 세 가지가 함께 확인된다.
둘째, 화해 증진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유일무이하게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국가의 아픔을 지닌 나라다. 평소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 교황의 말, 또 “어떤 의미에서 한국은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평화와 화해를 열망하는 ‘상징적’인 나라”라고 언급한 교황청 대변인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의 말이 시사하듯, 바티칸의 시각에서도 한반도의 평화는 곧 세계 평화를 의미하다시피 한다. 그러기에 교황은 방한 마지막 날 명동대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갖고 강론도 할 예정이다. 이 미사에 위안부 할머니들, 그리고 북한 천주교 신자 10여 명이 초대됐다. 필경 교황은 이 상징적인 의식과 만남이 치유와 화해의 작은 소용돌이를 이뤄 점점 증폭되면서 아시아로, 세계로 퍼져나가기를 염원할 것이다.
셋째, 격려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교황의 한국 방문의 결정적 이유로 ‘아시아 청년대회’가 공공연하게 언급되었을 만큼 젊은이들을 향한 교황의 사랑은 유별나다. 2013 세계 청년대회 참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소통 등으로 세계 젊은이들과의 지속적인 교감을 이뤄온 교황은 이번 방한을 통해 아시아 각국 청년들을 고루 만나는 자리를 갖게 된다. 교황의 청년 사랑이 각별한 것은 바로 그들이 ‘죽음의 문화’에 침식된 지구촌의 현재를 개혁할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인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를 미래로 열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이상 오늘날 세상에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조나 관습의 향수에 매달리지 않도록 합니다.”(졸저 ‘교황의 10가지’ 참조)
젊은이들이 지닌 혁신 에너지를 이처럼 높이 사고 있는 교황은 노인의 지혜와 젊은이들의 힘이 연합해서 추진하는 개혁을 꿈꾸고 그 희망으로 젊은이들을 격려하고자, 휴가를 반납하고 한국행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상이 교황의 한국 방문을 기하여 유추해본 목적론적 의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소 “모든 것을 보고(omnia videre), 많은 것을 식별하고(multa assimulare), 작은 것을 시정하라(pauca corrigere)”는 요한 23세 교황의 말을 매사를 위한 실행 지혜로 삼고 있다. 이는 역으로 교황의 ‘작은’ 행보는 ‘많은’ 중요한 것과 ‘모든’ 국면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만반의 준비로 손님맞이를 축제답게 마치고 차분하게 결과론적 의의를 채워가는 일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