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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이성호]“나 떨고 있니?”

입력 | 2014-07-15 03:00:00


이성호 사회부 차장

이른바 ‘매일기록부’가 세간의 화제다. 매일기록부는 올해 3월 발생한 서울 강서구 재력가 살인사건의 피해자 송모 씨(67)가 남긴 장부다. 현직 서울시의원의 살인교사 혐의로 주목받던 사건은 장부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정관계 로비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이미 현직 검사의 이름이 확인됐고 지역 정치인, 전현직 경찰관, 구청 공무원, 세무서 직원 등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이제 송 씨의 장부는 ‘판도라의 상자’가 됐다.

컴퓨터 문서작성 프로그램인 ‘아래아한글’이 개발된 지 25년이 됐지만 송 씨는 오랜 기간 깨알 같은 손글씨로 장부를 채웠다. 복사비 2000원, 주차비 1만2000원, 아귀탕집 4만2000원 등 자신과 관련된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적었다.

보통 이런 장부를 적는 사람은 존재 자체를 숨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잘못하면 자신의 은밀한 일상이 고스란히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밀장부’라는 이름이 당연하게 붙는다. 하지만 송 씨의 매일기록부는 달랐다. 지역 정치인 A 씨는 “송 씨가 장부를 쓰는 건 소문이 나서 다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전쯤 송 씨가 명절 떡값을 가져 왔기에 ‘당신이 장부 쓰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받냐’며 돌려보냈다”고 털어놨다. “장부가 없었으면 받으려 했느냐”는 질문에 A 씨는 “그건 아니고 ‘장부 때문에 더욱 안 된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송 씨 지인들에 따르면 매일기록부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장부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을 것이다. 송 씨 자신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부에 대해 묻는 주변 사람들에게 ‘치부책(置簿冊)’이라며 직접 설명했다고 한다. A 씨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10년 전 무렵부터 강서구 지역에서는 매일기록부의 존재가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셈이다.

물론 A 씨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송 씨의 남다른 습관을 미리 알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장부에 오르내리는 것을 사전에 막으려 했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현재 거론되는 장부 속 인사들은 아예 장부의 존재 자체를 몰랐거나 알면서도 돈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는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김형식 서울시의원도 있다.

금고 속에 있던 장부가 세상으로 나오면서 이 가운데 어떤 이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을까 밤잠을 설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는 공소시효(뇌물수수 혐의는 5년이다)를 계산해보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수도 있다. 아직까지 수사를 맡고 있는 검찰과 경찰은 모두 엉거주춤한 모습이다. 살인교사 혐의 입증이 더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자칫 제 살 도려낼 가능성을 걱정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사실 장부의 주인이 없기 때문에 진실 규명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과거 수많은 리스트(장부) 수사처럼 덮고 가기에는 지금 떨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 보인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