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가요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하고, 문제적인 인물 김추자가 돌아왔다. 시대를 앞서간 뇌쇄적인 퍼포먼스와 허스키한 목소리로 섹시 아이콘에 등극했던 그는 1981년 돌연 은퇴 후 대중 앞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었다.
5월 2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기자회견장에 들어서는 김추자와 소속사 박의식 대표(오른쪽).
5월 2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김추자(63)의 컴백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의 귀환은 올 상반기 가요계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 일찌감치 모여든 기자들은 긴장하며 출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 정장, 선글라스 차림에 긴 사자 머리를 흩날리며 그가 나타났다. 록 스피릿이 충만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영화 주인공 같았다. 단언컨대 2008년 오랜 잠적 끝에 자신을 둘러싼 루머를 종식시키고자 ‘벨트 기자회견’을 열었던 나훈아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등장이었다. 단상에 선 그가 선글라스를 벗었을 때 솔직히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기야 그는 늘 그저 노래 잘하는 가수 김추자였다. 그래서 그가 가요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 살아온 세월, 33년 만에 돌아온 배경이 궁금했다.
“그동안 꾸준히 노래와 춤 연습, 독일 유학 중인 딸이 용기 줘”
“노력했습니다. 마음을 써주십시오”
1969년 신중현 사단의 일원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김추자는 당시 가요계에 충격 그 자체였다. 동국대 신입 노래자랑 1위를 차지한 김추자는 펄시스터즈를 성공시킨 당대 최고의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인 신중현을 무작정 찾아간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곡이 김추자의 데뷔곡인 ‘늦기 전에’다. 김추자는 한국 가요사에서 최초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췄던 가수로도 기억된다. 리듬에 온몸을 맡기고 건들건들 육감적으로 몸을 흔드는 그의 퍼포먼스는 대중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후 그는 ‘거짓말이야’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커피 한잔’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기자회견에 함께 자리한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씨는 “당시 김추자가 안겨준 충격과 인기는 서태지 이상이었다. 한마디로 한반도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였다. 록, 사이키델릭, 소울을 모두 아우르며 기존에 없던 음악을 실험적으로 선보이고자 했던 신중현의 가장 대중적인 메신저이기도 했다”고 평했다.
취재진에게 인사를 해달라는 주문에 김추자는 “마이크 테스팅, 마이크 테스팅… 아아”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준비한 인사말을 쏟아냈다. “저를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이 사랑해주시는 팬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더 늦기 전에 무대로 돌아온 김추자입니다. 30년 이상 평범한 주부로 살아오다 다시 무대에 설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고 설레는 마음에 흥분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저는 새로운 앨범 제작에 심혈을 기울여왔습니다. 가수로서 좋은 노래로 팬들 앞에 서고 싶은 것이 당연하니까요. 이제 앨범이 다시 나와 노래를 하고 무대에 설 예정입니다. 많이 노력했다면 했습니다. 마음을 좀 써주십시오.”
이어서 이번에 새로 발매한 앨범 ‘It’s not too late’에 수록된 곡들이 소개됐다. 음악이 나오자 김추자는 본능처럼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은퇴와 함께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도 열린 것 같았다.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듯한 몸놀림은 그가 앞으로 보여줄 퍼포먼스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당연히 예전처럼 흔들어야죠. 신중현 선생님은 몸을 움직여야 소리가 나온다고 하셨어요. 이번 곡들은 아직 안무를 따로 정하지는 않았어요. 옛날에도 음악이 먼저 나오고 거기에 맞는 춤이 따라 나왔거든요. ‘거짓말이야’ 역시 곡을 받은 후 그것에 맞게 자연스럽게 손짓과 발짓이 나온 거예요.”
화려한 퍼포먼스는 김추자를 섹시 아이콘으로 만들었지만 한편으론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데뷔 이후 줄곧 그는 퇴폐적이고 뇌쇄적이라는 이유로 당국의 경계 대상에 올랐으며, ‘거짓말이야’는 제목 자체가 사회 불신을 조장할 뿐 아니라 노래를 부를 때 허공을 가르는 손동작이 북한에 보내는 수신호라는 소문이 돌면서 금지곡이 됐다. 그의 집에서 간첩들이 사용하는 난수표가 발견됐다는 루머도 있었다. 김추자는 1980년 정규 앨범 5집을 발표하고 그 이듬해 대학교수 박모 씨와 결혼한 뒤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는 은퇴도 당시 소문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강원도 춘천 조용한 곳에 살다가 서울에 올라와 가수가 돼 인기라는 것을 얻었는데, 너무 많은 소문이 따라붙었어요. CIA다, 간첩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사람을 괴롭히는데 정말 노래하기 싫더군요.”
소속사 대표(왼쪽), 음악 평론가 임진모(오른쪽) 씨와 함께 컴백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추자.
루머 때문에 연예계 생활에 염증
간첩설 이외에도 김추자에게는 숱한 사건과 스캔들이 따라다녔다. 1971년에는 김추자와 말다툼을 벌이던 매니저가 그의 얼굴을 소주병으로 난자한 사건도 있었다. 이 일로 김추자는 얼굴을 1백 바늘이나 꿰맸고 이후로도 성형수술을 6번이나 받아야 했다. 또 한 번은 부산 공연에서 김세레나와 피날레를 누가 할 것인지를 놓고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가 공연장에서 사라진 적도 있다. 당시 김추자는 머리끄덩이를 붙들고 싸워 가수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한국연예협회로부터 자격정지 3개월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나중에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홧김에 화장품 박스를 걷어찼을 뿐, 몸싸움을 벌이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1975년에는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2년 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인기만큼이나 연예계에서 굴곡이 많았던 그에게 결혼은 따뜻함을 선사했다. 1970년대 한국인이 거의 없던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유학한 그의 남편은 김추자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다. 서로의 배경도 모른 채 한눈에 반한 두 사람은 만난 첫해 양가 가족과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986년 딸을 얻었다. 그렇게 끼가 많은 사람이 답답해서 살림은 어떻게 했을까 싶지만 김추자는 남편, 딸과 함께한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한 가지를 잘하는 사람은 다 잘한다는 말처럼, 그는 살림에도 재주가 있었다. 그는 “친정어머니가 큰살림을 하셨는데, 모시고 살면서 많이 배우고 도움을 받았다. 부엌일이나 세탁일 모두 날래다. 빨래도 세탁기에 그냥 돌리지 않고 어머니가 하던 방식으로 푹푹 삶아서 두드려야 직성이 풀린다. 삶는 들통도 크기마다 다 있다. 딸이 나더러 ‘왜 이렇게 사냐, 조선시대 여자냐, 엄마가 가수 맞느냐’고 묻곤 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컴백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도 딸이다. 대학 졸업 후 서울대에 편입했다가 현재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은 “엄마는 좋은 악기를 목에 달고 다니는데 그 좋은 재주로 왜 노래를 안 부르냐.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엄마가 노래 한번 부르는 거 봤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며 다시 무대에 설 것을 권했다고 한다.
가요계를 떠났지만 음악을 손에서 놓은 적은 없었다. 시기를 특정하지 않았을 뿐, 그의 안에서 무대는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회귀 본능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보다 엄마를 잘 아는 딸이 심지에 불을 댕긴 것뿐이다.
“부엌에도, 응접실에도, 침대 헤드보드 옆에도 항상 라디오가 있었어요. 평소엔 주부 역할을 잘하다가도 한번 음악에 제대로 꽂히면 밥도 안 먹고, 낮에 자고 밤에 음악을 듣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기도 했죠. 그러다 거울을 보며 멜로디에 맞춰 춤을 추면서 아직도 내가 잘 돌아가나, 처지지는 않나 체크도 하고. 우리 집에 거울이 참 많습니다. 하하하. 남편과 아이는 어떤 때는 아마 제가 음악에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은퇴한 가수, 현역 가수, 걸 그룹 변천사, 요즘 노래 트렌드도 다 꿰고 있어요. 새로운 음악이 나오면 점수를 매겨보기도 하고,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을 찾아보기도 하고, 이거 외국 노래 표절했구나 이런 것도 알게 되고…. 누굴 꼬집어서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들으니 답이 나오더라고요.”
‘요즘 후배 가수들 가운데 왕년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거나, 노래 잘하는 사람을 꼽아달라’고 하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
“춤이며 노래, 화장까지 천편일률적이라 누가 잘한다고는 말 못 하겠어요. ‘괜찮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비슷한 가수가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딱 짚어서 ‘쟤다’ 그런 가수는 없더라고. 다들 열심히는 하는 것 같더군요.”
한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답게 그의 대답은 시원하고 거침이 없었다.
오랜만의 녹음 작업이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그저 듣기만 했겠나. 따라 흥얼거리기도 하고, ‘나였다면 이런 스타일로 불렀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음악을 옆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녹음 작업도 어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전성기 시절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를 낳았던 김추자가 오랫동안 기다린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매일 라디오 들으며 노래와 춤 연습
이번 앨범에서도 신중현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음반에 수록된 9곡 가운데 타이틀곡인 ‘몰라주고 말았어’ ‘가버린 사람아’ ‘태양의 빛’ ‘내 곁에 있듯이’ ‘고독한 마음’ 등 5곡이 신중현의 곡이다. 음반이 출시되기 전 신중현과 저작권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원만하게 마무리가 됐다고 한다.
“얼마 전 편찮으셔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도 신지 않고 맞아주시더라고요. 선생님이 술을 많이 드셔서 사모님이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았어요. 노래를 다시 부른다고 하니까 ‘그럼 좋지, 일 안 하던 사람이 하면 좋지’ 하시더라고요. 녹음이 끝나면 집으로 한번 찾아오라고도 하셨어요.”
김추자는 음반 발매와 함께 6월 28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콘서트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려왔던 팬들과 만날 계획이다. 이 순간을 위해 33년을 기다려온 그의 소망은 의외로 소박했다.
“어떤 성과를 기대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에요. 제가 노래를 잘 부르면 결과가 좋을 것이고, 못 부르면 나쁘겠죠. 노래를 못하는데 결과가 좋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요? 돈 벌기 위해 여기저기 매달리기보다 좋은 무대가 있으면 준비를 많이 해서 공연다운 공연을 하고 싶어요.”
듣기 좋은 말보다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스타일인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원조 디바’라는 수식어에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는 ‘디바’ 소리가 별로 좋지 않데요. 정말 디바를 디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다 디바라고 하더군요. 어떨 때는 그게 흉보는 소리처럼 들린다니까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설적인 가수’ ‘국민 가수’ 이런 말도 싫어요. 전설도 너무 많으면 재미없는 법이잖아요. 저한테는 그런 수식어를 빼주시면 좋겠어요. 그냥 ‘김추자 씨’‘노래 잘하는 가수 김추자’ 그렇게 불러주세요.”
김추자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더 낮고 걸걸했지만 그의 음악은 예전 질감 그대로다. 방부제를 섞지 않은 듯한 그의 소리가 빠르고 트렌디한 음악에 익숙해진 대중에게 얼마나 어필할지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박제된 여왕이기를 거부하고 현실에 ‘풍덩’ 뛰어든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글·김명희 기자 | 사진·박해윤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