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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정임수]자살보험금

입력 | 2014-07-16 03:00:00


정임수 경제부 기자

며칠 전 퇴근길에 처음으로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밥은 먹었어? 오늘 하루 어땠어?… 힘든 일은 모두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해 보면 어떨까?…” 걸음을 따라 전등이 켜지는 다리 난간에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는 듯한 따뜻한 글귀가 이어졌다. 선선한 강바람을 맞으며 메시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퇴근길 큰 위안이 됐다.

자살을 막기 위해 2012년 9월 ‘생명의 다리’로 조성된 마포대교는 한강의 명소가 된 지 오래다. 마포대교 중간에 맨 처음 설치된 ‘SOS 생명의 전화’도 이제 8개 한강 다리에 33대로 늘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 운영하는 이 전화는 지금까지 자살예방 전문상담사가 24시간, 365일 대기하며 삶을 포기하려고 한강 다리에 선 1340여 명의 생명을 구했다. 10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세운 한국에서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다.

요즘 자살이 뜨거운 이슈가 된 곳이 금융권이다. 이른바 생명보험사의 ‘자살 보험금’ 때문이다. 생명보험은 가입자가 계약 후 2년이 지나 자살하면 보험금을 지급한다. 다만 자연사나 질병으로 숨졌을 때 적용하는 ‘일반사망 보험금’을 준다. 교통사고, 재해 등으로 사망했을 때 적용하는 ‘재해사망 보험금’은 지급하지 않는다. 통상 재해사망 보험금은 일반사망의 2, 3배나 된다.

문제는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 4월 표준약관 개정 이전까지 생보사들이 판 상품이다. 여기엔 자살을 재해로 인정해 재해사망 보험금을 준다는 내용의 특별약관이 있었다. 생보사들은 뒤늦게 문제를 인식하고 2010년 4월 이를 전면 수정했다. 그러면서 이는 ‘표기 실수’일 뿐이고 기본적으로 자살은 재해가 아니라며 일반사망 보험금을 지급해 왔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해 8월 금융감독원의 ING생명 검사 과정에서 적발됐고, 일부 외국계 보험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보사가 이 문제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생보사들이 그동안 자살한 보험계약자를 대상으로 지급하지 않은 재해사망 보험금은 2179억 원에 이른다.

당초 “자살 보험금이 대거 지급되면 자살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보험사 주장에 동조했던 금융당국은 시민단체 등의 비판이 거세지자 최근 ‘보험약관 준수’라는 기본 원칙을 중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금감원은 이미 ING생명에 징계를 사전 통보했으며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신제윤 금융위원장도 “약관을 가능한 한 지키는 게 맞다”고 밝혔다.

장기적으로 계약이 지속되는 보험은 보험사와 소비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산업이다. 보험사가 가입자와의 약속인 약관을 지키지 않으면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보험금 지급액이 커지면서 보험금을 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금융당국과 생보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안을 짜내야 한다. 생보사들이 과거 약관대로 자살 때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보험계약이 282만 건에 이른다. ‘SOS 생명의 전화’가 더 필요한 때다.

정임수 경제부 기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