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더위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호텔을 나서자마자 눅눅한 기운이 달라붙었고, 100m도 채 걷기 전에 땀으로 목욕을 했다.
“아빠, 더워 죽겠어. 에어컨 나오는 데 들어가면 안 돼?” 아이가 우는 소리를 했다. 높은 습도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딸애를 달래며 두 블록쯤 걸었을까? 이번엔 아내가 불만을 토로했다. “왜 하필이면 이런 데 와서 고생이람?”
남편은 기가 막혔다. 홍콩으로 휴가를 가자고 조른 장본인이 아내였다.
부부는 땀을 줄줄 흘리며 논쟁을 벌였다. “올해 초부터 그랬었잖아. 남들은 다 가봤는데 혼자만 못 가봤다고.” “내가 언제? 그냥 남들 얘기 전한 거잖아.”
남편은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을 ‘모른다’며 연거푸 부인하는 아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말로 기억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진실은 회색지대에 넓게 펼쳐져 있다. 여자들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생각이 남성의 사고방식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성의 생각에선 추론과 판단이 중요한 반면 여성의 생각 가운데 많은 부분은 기분이 차지한다.
남편이 결정적인 사실을 기억해냈다. “내가 그랬잖아. 홍콩은 여름 날씨가 좋지 않으니까 겨울에 가자고. 그런데도 고집을 부린 게 누구야? 당신 아니야?”
사실, 그녀는 홍콩으로 휴가를 가자고 밀어붙인 적이 없다(고 믿는다). ‘가봤으면’ 하는 바람이 약간 강했고 그걸 표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잘 말려주지 못하고 급기야 이런 고생을 하게 했으니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그랬던 아내의 기분이 집에 돌아와서는 또다시 바뀌었다. 친구들을 만난 이후다.
최악이었던 홍콩 휴가가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자랑거리이자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거듭났다.
기분은 이성적 판단보다 빠르고 솔직하지만 연속성이나 일관성에선 떨어지기 마련이다. “내가 언제?” 하며 발끈하는 여성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지금 좋지 않은 일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나쁘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이 뭘 어찌 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한상복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