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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사람이 축구계 망쳤다”

입력 | 2014-07-20 21:06:00

인터뷰 | 김호 전 국가대표 감독의 직설(直說)

● 축구계 적폐(積弊)가 문제의 본질
● 조광래 전격 경질부터 잘못됐다
● 홍명보는 월드컵을 쉽게 봤다
● 2002월드컵 4강 신화의 부작용







김호 전 감독은 2011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1차 예선 도중 조광래 감독을 전격 경질한 것은 대한축구협회 회장선거를 앞두고 반대파를 제거하려 한 것과 관련이 있고, 최강희 감독이 “아시아 최종 예선까지만 맡겠다”고 말한 것은 축구협회 내부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브라질 월드컵 참패 이후 애초 홍명보 감독을 유임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대회 기간 중 전격 경질한 차범근 감독의 사례와 큰 차이가 있다. 당시 차 감독이 축구협회와 껄끄러운 관계였다면, 지금의 홍 감독은 축구협회 실세 중의 실세가 아끼는 인물. 그러니 들이대는 잣대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번의 감독 교체

김 전 감독은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강호 스페인과 2대 2로 비기는 등 2무1패의 성적으로 2002 한일월드컵 직전까지 최고의 성적을 올렸고, 축구감독으로 ‘13번 반’이나 우승을 차지해 명장(名將) 반열에 올랐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2010년 ‘아시아 감독의 해’로 정하면서 김 감독을 ‘한국 감독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평가했다. 김호 감독을 7월 5일 잠실롯데호텔에서 만나 4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이어 7월 10일 홍명보 감독이 사퇴한 후 전화로 이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추가했다.

▼ 한국 축구가 브라질 월드컵에서 참패를 당한 가장 큰 이유는.
“브라질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감독이 너무 자주 바뀌었다. 2010 남아공월드컵 이후 조광래 감독이 브라질 월드컵 감독에 선임됐는데, 조 감독이 2011년 8월 일본 삿포로에서 있었던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0대 3으로 패하고,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1차 예선 도중 약체 레바논에 패(1대 2)하는 등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위원회도 열지 않고 경질한 것은 말이 안 된다. 조 감독의 1차 목표는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통과, 2차 목표는 한국 축구 사상 처음으로 원정 월드컵 3라운드(8강이라고도 한다)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중도에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최강희 감독이 바통을 이어받았는데, 최 감독은 아시아 최종 예선까지만 맡는다는 이상한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한국 축구는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 올랐고, 마치 각본처럼 월드컵 대표팀을 맡은 홍명보 감독에게는 1년밖에 시간이 없었다. 월드컵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다. 더구나 홍 감독은 클럽감독 경험이 없었고, 국가대표팀 감독도 처음이었다.”

▼ 홍 감독은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와 런던 올림픽 경험이 있지 않은가.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은 만 23세 이하의 선수에 와일드카드로 3명이 들어간다.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들이 뛰는 월드컵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월드컵에도 20대 초반의 선수가 뛰기는 하지만 한 팀에 3~4명에 지나지 않는다. 홍 감독이 월드컵을 너무 경시(輕視)한 것으로 보인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것이 이번에 오히려 악재(惡材)가 된 것 같다.”

▼ 최강희 감독은 왜 아시아 예선까지만 맡는다고 했을까.
“내 추측인데 당시 올림픽 대표 감독이던 홍명보 감독과 축구협회 간에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월드컵 본선은 당시 올림픽 감독이던 홍명보 감독이 맡는 것으로 내정돼 있고, 국제대회 경험이 적은 최강희 감독은 아시아지역 예선까지만 맡는 것으로….”

▼ 축구협회도 월드컵 같은 큰 대회는 한 감독이 최소한 3~4년은 맡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조 감독을 경질할 때 기술위원회도 열지 않고 황보관 기술위원회 위원장이 통고하는 형식을 취했다. 기술위원회는 우리나라에서 축구에 관한 한 최고의 실력파가 모여야 하고, 가능한 한 회장으로부터 독립되어 소신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데 현재 기술위원회를 보면, 과연 한국 최고의 축구 실력파가 모였는지 의문이 든다. 기술위원회 자체도 과거에 비해 위상이 많이 떨어져 있다. 기술위원회뿐 아니라 상벌위원회, 심판위원회, 국제축구행정 등 대한축구협회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군인 축구팀이 잇따라 해체돼 프로축구 선수의 병역 문제가 시급하고, 한국 축구의 성지(聖地)인 동대문축구장과 국가대표 훈련장이던 미사리축구장이 사라져도 별로 따지는 사람도 없다. 특히 동대문운동장은 아마추어 선수들을 위해서 그리고 스포츠문화 유산을 위해서 반드시 남겨놨어야 했다. 거기에 프로축구 드래프트 제도의 난맥상까지…. 대한축구협회가 축구인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축구인 위에 군림하려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5위 일체론


▼ 홍명보 감독과 허정무 부회장이 동반 퇴진 했다.
“두 사람의 퇴진은 해결책이 못 된다. 국제대회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경질되거나 사퇴를 하는 것은 수십 년 동안 반복해온 일이다. 홍 감독이 월드컵 감독후보로 거론될 때부터 축구계에서는 지도자 경험이 일천하고 월드컵을 맡기에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리고 월드컵 본선에 대비하기에 1년은 너무 짧았다. 그런데도 무리수를 둔 거다. 누가 홍 감독을 선임했나. 회장 아닌가. 그리고 그 회장을 뽑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부추긴 결과다.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 거다. 사과는 물론 장기적으로 한국 축구의 수십 년을 내다보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축구협회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4년 후 2018 러시아 월드컵이 끝나고도 또다시 이 같은 일이 반복될 거다.”

▼ 5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내년 1월 호주 아시안컵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아시안컵이 문제가 아니다. 축구는 모든 것이 월드컵으로 통한다. 유소년 축구대회, 17세, 21세 이하 청소년 축구대회, 아시안컵 심지어 올림픽 축구까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내년 1월 열리는 호주 아시안컵은 앞으로 4년 후에 열리는 러시아 월드컵을 위한 첫 준비 단계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결과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분석해서 그로부터 3년 후에 있을 러시아 월드컵에 대비해야 한다. 아시아 무대에 머물면 안 된다. 일본을 봐라. 이번에 실패했지만 일본은 2030년대에는 국제축구연맹 20위 안에 들어 월드컵에서도 무리 없이 8강에 오르는 등 세계 축구 대열에 당당히 올라서고, 2050년에는 월드컵에서 우승한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실제로 하나하나 실행해간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실패한 후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이 사표를 내자 곧바로 멕시코 출신의 하비에라 아기레 감독으로 바꿨다. 우리나라와 달리 실패에 대한 준비가 돼 있었던 거다.”

6월 27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벨기에전에서 경기 후반 패색이 짙어지자 고개를 숙인 홍명보 감독.

▼ 한국 축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1990년대 초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한 우물이다. 물이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다. 축구를 정말 사랑하는 축구인이 협회나 연맹에서 한국 축구와 축구인을 위해 신명 나게 일해야 한다. 축구를 자신의 안위나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국제대회 유치 시기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국 축구는 이미 2002년 한일월드컵, 2007년 17세 이하 FIFA월드컵을 개최했고, 오는 2017년 20세 이하 FIFA 월드컵을 개최하게 된다. 지난 두 번의 대회는 모두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에 개최됐고 오는 2017년 역시 대통령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왜 큰 선거를 치를 때마다 국제축구대회를 개최했을까. 축구인에게 축구는 신앙이나 마찬가지인데, 축구에 대한 사랑은커녕 조그마한 애정도 없는 비(非)축구인들이 자신과 코드가 맡는 일부 축구인을 내세워 국내 축구계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축구를 이용만 하려는 사람들이다.
축구협회 예산이 1년에 1000억 원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돈이 어떻게 지출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정몽규 회장이 지난 회장 선거 때 축구협회 예산을 3000억 원으로 늘리겠다고 했는데, 과연 임기 내에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축구는 선수와 지도자, 매스컴과 팬, 그리고 협회가 ‘5위 일체’가 돼야 한다. 그런데 협회가 조정은커녕 군림만 하려 하니 문제인 것이다. 그건 프로축구연맹도 마찬가지다.”

▼ 그래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오는 2017년 FIFA 20세 이하 대회 유치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게 문제다. 대회만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개최한다고 해서 우리나라 축구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유치할 때 나는 개인적으로 반대했다. 우리나라 축구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 월드컵을 유치해야 한국 축구가 발전한다고 봤다. 축구 수준도 세계 정상에 비해 한참 떨어지고, 인프라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가운데 덜컥 월드컵을 치르면 오히려 부작용이 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월드컵을 치르고 나서 한국 사람들의 축구를 보는 눈만 높아졌다. K리그를 우습게보고, 아시아를 대표해서 월드컵에 나가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제는 월드컵 8강 또는 그 이상을 바란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8강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16강에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명백히 느끼지 않았는가.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전국에 4만 명 이상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축구 전용 경기장을 10개나 지었는데, 관리를 제대로 안 해 지금 거의 모두 흉물로 전락했다.”

꾸준하게 투자해야

7월 10일  축구 국가대표팀 사퇴 기자회견을 하기 전 인사를 하는 홍명보 감독.

▼ 2002 한일 월드컵 때 지은 축구 전용 경기장을 프로축구 팀들이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이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의자, 잔디, 조명 등 시설이 엉망이다. 그리고 프로축구는 주로 주말에 하는데, 주말에 축구장 일부시설을 예식장으로 빌려줘서 프로축구 경기를 하는데, 한편에서는 결혼식을 올린다. 가뜩이나 주차시설이 부족한데, 축구경기와 결혼식이 겹치면 그야말로 주차 전쟁을 치러야 한다. 주중에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 축구를 보면서 힐링을 하려는 사람들은 축구를 즐기기에 앞서 자동차를 주차하기 불편하고, 또한 주차비도 만만치 않다. 도대체 축구 경기를 보면서 주차비 걱정을 해야 하는 건 또 뭔가? 지방자치단체에 축구장 관리를 맡기지 말고 국가가 직접 나서야 한다.”

▼ 한국 축구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4강에 오르지 않았나.
“그 4강 때문에 한국 축구, 특히 국내 프로축구 K리그가 크게 희생되어야 했다. 우선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엄청난 연봉을 지급해야 했고, 거의 1년 반 이상 K리그가 위축되었다. 히딩크 감독이 선수를 내달라고 하면 우리 K리그 감독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내줘야 했고, 결국 K리그 3~4명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처럼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홈그라운드 이점까지 안고 있는 상황에서였다면 나뿐 아니라 당시 K리그 어떤 감독이라도 4강은 몰라도 엄청난 성적을 냈을 것이다.”



▼ 선수 얘기 좀 해보자. 브라질 월드컵 때 일부 선수, 특히 손흥민 선수는 가능성을 보이지 않았나?
“손흥민 선수는 드리블이 괜찮고 킥 능력도 좋다. 그리고 스피드도 뛰어난 편이다. 그러나 몸싸움에 약하다. 공격수는 상대 수비수와 몸싸움을 즐겨야 한다. 예를 들면 우루과이의 악동 루이스 수아레스(181cm, 80kg) 선수는 손흥민(183cm, 78kg)과 비슷한 체격 조건에 플레이 스타일도 비슷하다. 두 선수 모두 드리블, 킥, 스피드 다 좋은데 다른 점은 투쟁심이다. 손흥민 선수는 몸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아레스 선수가 상대 선수를 깨무는 것은 지나친 행위지만 어떻게든지 수비수와의 몸싸움에서 이기려는 투지는 공격수로서는 최고 덕목이다. 안타까운 점은 몸싸움을 즐기는 투쟁심은 선천적이라는 것이다. 역대 국내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는 차범근도 현역 시절 몸싸움을 즐기지 않았는데 그 대신 스피드가 워낙 좋아서 약점을 보완했다. 기성용은 킥 능력과 패스가 거의 월드클래스급이지만 멘탈이 부족하다. 지도자에게 반항한다든지, 애국가가 나올 때 가슴에 왼손을 얹는다든지 하는 것은 축구인이기에 앞서 인성(人性)이 부족함을 뜻한다. 그밖에 박주영, 이청용, 구자철, 김신욱, 이근호 등은 아시아권에서는 충분히 통할 만한 기량을 갖고 있지만 월드클래스는 아니다. 예술이나 스포츠에는 답이 없다. 훈련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창의적인 플레이가 나오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꾸준하게 투자해야 한다. 요즘 스포츠맨도 공부 해야 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축구에 맞는 공부를 시켜야 한다. 기본적인 실력에 역사와 사회, 그리고 영어를 배워놓으면 최소한 전문 바보는 안 된다. 독일에서는 한 분야에 특출하지만 다른 분야에 문외한인 사람을 전문 바보라고 한다.”

▼ 그러면 어떤 선수가 월드클래스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가.
“제2의 고종수 같은 선수. 고종수는 정말 천재 선수였다. 축구 아이큐가 200은 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축구를 위해 타고난 것처럼 열정적이었고, 축구를 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가끔 엉뚱한 짓을 해서 문제가 됐는데, 그래도 축구 훈련과 경기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 다만 축구장 밖에서 친구를 잘못 사귄 것 때문에 더 큰 선수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 고종수를 직접 발굴한 것으로 아는데, 관리가 안 되던가.
“아들 이기는 아버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제자 이기는 스승도 없다. 정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사생활에 관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 좋은 선수가 나오려면 K리그가 활성화해야 하는데,
“우선 드래프트 제도가 문제다.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팀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자기가 원하는 팀에서 마음껏 축구를 하는 제도가 돼야 한다. 그리고 1부 리그 12개 팀이 너무 적다. 1부 리그가 16팀은 되어야 하고  2부 리그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팀이 많아야 뛸 수 있는 무대가 넓어지고 좋은 선수도 발굴할 수 있다. 그리고 경기의 질을 높여야 한다. 축구인 출신들이 각 구단 책임자가 돼 서로 이마를 맞대고 경기의 질을 높일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 분명히 길이 있다. 축구의 질이 높아지면 방송국에서도 많은 중계료를 내고 중계를 해주는 선순환이 이뤄지게 될 것이다. 각 그룹에서 밀려나서 울며 겨자 먹기로 프로축구 팀 수장을 맡은 비축구인들에게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

도하의 기적

7월 10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오른쪽에서 세번째) 등이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거둔 부진한 성적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 김 감독 하면 ‘카타르(도하)의 기적’이 떠오르는데.
“카타르(도하)의 기적이 생기기까지는 일본의 자충수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은 원래 싱가포르나 홍콩에서 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중동 국가들이 중동에서 열려고 로비를 했고, 결국 일본이 중동의 손을 들어줘서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아시아 축구계에서는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가 1, 2위를 차지해 나란히 미국 월드컵에 출전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축구연맹(AFC)과 관계도 좋았고, 또 중동 국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아시아에 2장뿐(당시 월드컵은 본선에 24개국만 출전했다)인 월드컵 본선 티켓 획득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리고 일본이 AFC를 어떻게 조종했는지 한국을 떨어뜨리려고 한국 팀이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최강 팀과 잇따라 붙게 됐다. 강팀과 한두  번 맞붙으면 약팀과 한 번 싸우는 게 일반적인 경기 일정이다. 당시 한국은 6개국이 출전해 1, 2위가 미국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는 풀리그에서 미우라 선수의 결승골로 일본에 0대 1로 패했다. 이것이 발목을 잡아 북한과의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놓고 탈락이 거의 확정된 상태였다. 그리고 한국과 북한전이 진행되는 시간에 동시에 치러진 일본 대 이라크 경기에서 일본이 이기면 한국 대 북한전 결과와 상관없이 사상 처음 월드컵에 진출하게 됐다. 그렇게 되면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계획했던 대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일본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해 미국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의 경기에 앞서 이미 탈락이 확정된 북한이 사력을 다해 덤볐다. 나중에 예멘 대사에게 들었는데, 당시 김일성이 “비록 월드컵 본선 티켓은 놓쳤지만 한국에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을 3대 0으로 이겼다. 한국이 국제대회에서 북한을 3골 차로 이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을 3대 0으로 이기고 라커로 들어오는데 이라크 오만 자파르 선수가 경기 종료 10초 전에 터뜨린 헤딩 골로 이라크와 일본이 비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 선수단은 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난리가 났다. 자파르는 나중에 대한축구협회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1994년 미국 월드컵은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출전했고, 일본은 월드컵 첫 출전을 1998년 프랑스 대회로 미뤄야 했다.”

▼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와 한 조로 편성돼 2무1패의 좋은 성적을 올렸는데.
“당시 나는 한국 축구 최초의 전임감독이었다. 월 100만 원(연봉 1200만 원)을 받았지만, 국가대표 팀만 맡았기 때문에 독일, 스페인, 잉글랜드 등 유럽에 가서 경기를 직접 보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 결론적으로 유럽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한 시즌에 정규리그, 컵 대회, 챔피언스리그, A 매치 등 최소한 70경기 정도 치르기 때문에 매년 5월 초나 중순쯤 시즌을 마치고, 6월에 치르는 월드컵 대회 때는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출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월드컵 조 예선을 치를 무렵 유럽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질 것으로 판단하고 우리 선수들의 체력과 조직력을 기르는 데 중점을 뒀다. 어차피 개인기는 뒤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2골을 먼저 내주고도 경기 막판 홍명보 서정원이 만회골을 터뜨려서 2대 2로 비겼고, 독일과의 경기에서도 전반에 3골을 먼저 허용하고 후반에 홍명보 황선홍 선수가 2골을 만회해 2대 3으로 패했다. 그때 아마 시간이 5분만 더 있었어도 독일을 침몰시켰을 것이다. 내가 지도자로서 많은 경기를 치렀지만 독일에 2대 3으로 아깝게 패한 경기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 그런데 볼리비아와는 0대 0으로 비겼다.
“당시 볼리비아는 남미 예선에서 브라질을 2대 0으로 꺾었을 정도로 강한 팀이었다. 지금의 칠레, 콜롬비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당시 콜롬비아에는 에체베리라는 남미 최고의 선수가 있었고, 에체베리와 함께 산체스가 공격을 이끌었는데, 에체베리는 무릎 부상으로 본선에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에체베리급 선수인 산체스를 잡기 위해서 강철, 신홍기 선수에게 특별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어쨌든 2무1패로 조 예선에서 탈락했는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미국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김 대통령이 앞으로 한국 축구가 어떻게 해야 조 예선(16강)을 통과할 수 있겠느냐고 묻기에, 많은 선수를 육성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프로축구 팀이 많아야(당시 6개 팀) 한다고 했다. 이듬해인 1995년에 삼성그룹에 팀이 생겨서 내가 창단 감독으로 가게 됐다.”

▼ 스페인, 볼리비아와 비기고 독일까지 혼냈으면 한국 축구 여건에서는 잘한 건데 귀국할 때 반응은 어땠나.
“축구협회는 미국 월드컵 대표 선수단을 마치 패잔병 취급을 했다. 선수단은 김포공항에 귀국하자마자 해단식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감독인 나는 죄인처럼 서둘러서 공항을 빠져나와야 했다. 비록 20년이 지났지만 여건만 되면 당시 대표선수들을 한자리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싶다.”

절반의 우승

▼ 얘기를 듣다보니까 수비수인 홍명보가 미국 월드컵에서 2골이나 넣었다.
“홍명보는 원래 공격수 출신이다. 그래서 공격하는 수비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홍명보와 함께 스리백을 이룬 왼쪽 김태영, 오른쪽 최진철이 몸싸움을 잘하는 선수들이다. 이들이 몸싸움에는 약하지만 길목을 잘 막아서는 홍명보와 기가 막히게 호흡이 잘 맞은 것이다.(홍명보는 당시 터키와의 3, 4 위전에서 경기시작 11초 만에 실수로 골을 허용해 ‘월드컵 최단시간 골 허용’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 김 감독의 우승 경력이 13번이면 13번이고, 14번이면 14번이지 왜 13번 반인가?
“13번 반이란 것은 나만의 반어적 표현이다.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수원삼성 팀을 처음 맡은 1995년 수원 삼성은 1차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2차 대회 우승을 차지한 울산 현대와 결승전에서 만났다. 우리가 울산 현대 홈 구장에서 치러진 원정 1차전에서 1대 0으로 이겨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1차전에서 우리 팀 공격의 핵인 유리 선수가 퇴장당했고, 2차전에서는 박충균 등 무려 3명의 선수가 퇴장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으면서 8명이 싸워야 했다. 결국 1대 3으로 패해 골 득실차로 우승을 내줘야 했다. 그 당시 심판은 영구제명을 당했고, 우리는 첫 우승을 놓쳤다. 그래서 정말 억울하게 우승을 내줘야 했기 때문에 ‘절반 우승’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영화배우 신성일 씨처럼 백발이 잘 어울리는 김호 감독은 대화를 나눈 4시간 내내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열변을 토해냈다. 자연인으로 보수의 한(恨), 축구인으로 진보의 한(恨)을 품고 있었다. 자연인으로서는 개인보다 국가를 내세우는 애국자였고, 축구인으로서는 스포츠맨십을 생명으로 정의를 앞세우는 진정한 축구인이었다. 김 감독에게 “새는 좌우의 양 날개로 편안하게 날잖아요”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이 기사는 신동아 2014년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